윌리엄 글래드스톤

출생 1809년 12월 29일

acs_db_william_gladstone지지자들로부터 ‘만인의 윌리엄’으로 불렸던 윌리엄 이어트 글래드스톤─내가 들어 본 별명 중에 제일 이상하다.─은 영국 수상을 4회 역임했으며 역대 최고의 수상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 정치인이다.

리버풀에서 태어난 ‘윌리’는 앤 맥캔지와 존 글래드스톤 경 부부의 자녀 6명 중 다섯째였다.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수학과 고전을 전공한 윌리는 연합 토론회 회장을 맡았으며 왕당파 대변인을 역임하기도 했다.

글래드스톤은 1832년에 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에 입성한다. 하원에서는 왕당파의 일웜으로 노예 폐지에 반대한다. ─나 원 참.─ 이후 노예 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카리브해 9개 플랜테이션에서 2천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던 아버지를 도와 정부에서 10만 파운드 이상을 받아낸다. 의원을 역임하면서 평생의 경쟁자인 벤자민 디즈레일리를 만나게 되고, 그의 ‘겉멋을 부리는 옷차림’에 늘 질겁한다.

그는 정치 분야에서는 성공했지만 사회생활에서는 서툴러서 결혼하기가 어려웠다. 캐롤린 엘리자 파쿠하르와 프란시스 해리엇 더글라스에게 차례로 청혼을 거절 당한 윌리는 캐더린 글린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이후 결혼을 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59년동안 부부로 살아가게 된다. ─59년이라니, 지루하지도 않았을까.─

1840년에 글래드스톤은 창녀들을 ‘구출하여 갱생’하는 사업을 시작하여 이후 수십년동안 계속하게 된다. 그에 대해 동료 정치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의원에 여러 차례 당선하면서 글래드스톤은 1859년에는 재무 장관, 1868년에는 자유당 당수를 역임한다. 그리고 1868년에 처음 수상이 되어 1874년까지 직무를 수행한 후 즉시 은퇴한다. 하지만 은퇴한 기간 동안 디즈레일리가 변절한 데 분노하여 다시 의회로 돌아와 3회 더 수상을 역임한다.1)1880~1885년, 1886년, 1892~1894년.

경쟁자였던 디즈레일리와는 달리 글래드스톤은 빅토리아 여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여왕은 “글래드스톤은 늘 공청회에 참석한 듯한 말투를 쓰는 군.”하고 불평하기도 했다.

윌리엄 글래드스톤은 1898년에 노환에 의한 심장병으로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묻혔으며, 이후 부인도 그의 옆에 묻혔다.

─물론 죽은 후에 옆에 묻혔다는 뜻이다.─

각주   [ + ]

1. 1880~1885년, 1886년, 1892~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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