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의 사회 계급

스파르타 사회

스파르타 사회는 근검, 자급자족, 외부 요소에 대한 적대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사회는 시민, 페리오이코이, 농노의 3가지 사회적 계급으로 나뉘었습니다.

시민들은 스파르타인, 또는 호모이오이1)동등한 자라고 불렸습니다.

시민들은 대부분 동등한 권리와 재산을 가진 자유인이었지만, 정치 참여는 극도로 제한되었습니다.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타가 통치하는 주변 지역에 살았습니다.

이들은 땅을 경작 했고 대개 상인과 장인이었습니다.

페리오이코이들 또한 군의 일부였고 그들의 땅은 적의 공격을 방어할 최전선이었습니다.

농노는 스파르타에서 가장 낮은 계급이었습니다.

이들은 스파르타인에 자유를 뺏긴 사람들로, 노예가 되어 도시를 섬겼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랬기에 일체의 정치적 혹은 사회적 권리도 없었습니다.

스파르타 사회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고대 그리스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학자들도 사료가 부족한 까닭에 어려움을 겪고 있죠.

고전기에 들어선 스파르타의 사회 체계에는 3가지 주요 계층 외에도 히포메네이오네스, 브라시데이오이, 모타케스, 네오다모데이스 같은 하위 계층이 생기며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이 모든 계층을 단결시켰던 요인에는 잔인한 스파르타인 지배자들에 대한 공포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의 삶 전반을 장악하고 있던 엄격한 규율도 포함되었습니다.


헬로트2)농노

농노들은 스파르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폴리데이케스에 따르면 이들의 지위는 예속과 자유 사이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농노는 2가지 측면에서 다른 노예와 차별화되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가족을 꾸리는 것이 허락되었고 시민 개인이 아닌 스파르타 시의 공적 소유 아래에 놓였습니다.

공공재산으로 여겨졌던 농노는 상품으로 판매할 수 없었습니다.

대부분은 농지를 경작했지만, 스파르타인과 함께 전쟁에 나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노동의 결실을 스파르타에 넘겼지만, 스스로도 상당 부분을 가져갔습니다.

덕분에 몇몇 농노들은 자유를 살 수 있을만큼의 돈을 모을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군사 작전에 참가해 국가를 잘 섬긴 농노들은 시민의 권리를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스파르타인과 페리오이코이, 농노의 비율은 대략 1:3:7이었습니다. 한편 현대의 역사학자들은 기원전 5세기의 스파르타의 인구는 약 1만 2천~1만 5천명의 스파르타인, 4만~6만명의 페리오이코이, 14만~20만명의 농노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출처는 제각각이지만, 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한 고대의 작가들은 스파르타인과 농노의 사이가 나쁘다고 기록했습니다. 농노들은 스파르타인들의 전투와 군사 원정을 돕기도 했지만, 스파르타의 시민들을 공격했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농노들이란 자신의 주인이 겪게 될 모든 불행을 언제든 이용할 준비가 돼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파르타인도 농노를 굉장히 잔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기원전 424년, 스팍테리아 전투가 벌어진 지 1년이 지난 후에 벌어진 사건에서 특히 두드러집니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2천명의 농노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스파르타인들이 비밀리에 모두 학살해버렸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공포와 반란

스파르타의 건국은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도시에 대한 사료는 한정적입니다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스파르타는 라코니아 지역까지 확장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는 서서히 메세니아의 영토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결국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스파르타는 분쟁을 통해 더 많은 땅을 얻었고 시민과 페리오이코이 계급을 분리했습니다.

기원전 640~620년 사이에 벌어진 2번째 메세니아 전쟁 이후로 인구는 호모이오이, 페리오이코이, 농노의 3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라코니아의 농노는 대부분 스파르타의 통치에 복종했고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반면 메세니아의 농노는 스파르타에게 항거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반란은 기원전 464년 메세니아에서 벌어진 1번 뿐이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스파르타 병사를 지원하기위해, 그리고 스파르타 본토에서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태를 방지하기위해 농노를 군사 원정에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전략이 언제나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기원전 464년, 라코니아에 지진이 발생했고 기록에 따르면 대략 2만명의 스파르타인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기회를 노렸던 농노들은 지진의 여파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이 얼마나 격렬 했던지, 스파르타는 2년 후인 기원전 462년에 아테네는 물론이고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한 도시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했죠.

아테네의 장군 키몬은 스파르타를 돕기위해 간신히 4천명의 중장보병을 소집했습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병력이 펠로폰네소스에 대한 스파르타의 장악력을 악화시키기위해 농노를 지원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결국 스파르타는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지만, 반란으로 인해 도시의 해외 정책과 외교 관계는 크게 어그러지고 말았고, 이 반란은 고전기 스파르타의 불안했던 사회상을 보여주는 가장 큰 사례로 남게 되었습니다.


농노 병사

기원전 5세기 무렵의 농노들은 군대에서, 특히나 펠로폰네소스 전쟁기간동안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육상에선 중장보병으로 복무했고 해상전에선 노잡이로 복무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스파르타에 중요한 수적 우세를 제공했습니다. 전장의 스파르타인 1명당 최소 일곱의 농노가 동행 했으니까요.

여러 고대 사료에서 스파르타인과 농노들 간의 적대적 관계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전시 상황에서는 이들에 대한 대우가 좀 더 나았을 것입니다.

기원전 425년 120명의 스파르타 정예병력과 300명의 농노가 아테네 병사들에게 포위 되었던 스팍테리아 전투가 그 예입니다.

스파르타인들은 농노들에게 전투 중 명령에 잘 따른다면 자유를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비슷한 예로 같은 시기의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는 700명의 농노와 함께 전투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용기와 충성을 눈여겨본 브라시다스는 농노 전원을 해방했고 그들이 페리오이코이가 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스파르타의 군사 원정에 크게 기여한 농노들은 ‘네오다모데이스’라 불렸고, 뛰어난 무훈의 댓가로 자유와 약간의 토지, 심지어는 정치적 권리까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 대한 자료는 부족하지만, 네오다모데이스의 수는 2천명이 넘었고 고전기의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네오다모데이스’라는 이름은 이들이 새로운 정치적 공동체3)‘데모스’를 구성하는 젊은이들4)‘네온’이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네오다모데이스 계층의 도입은 아마도 기원전 4세기 후반동안 그리스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던 새로운 사회 현실을 적시하기 위해 스파르타가 기울였던 노력의 일환일 것입니다.


페리오이코이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타 인구를 구성하는 또 다른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시 내부가 아니라 주변 지역에 거주했습니다.

페리오이코이는 스파르타에 결코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두 계급을 하나로 묶어 ‘라케다이몬인’이라고 불렀죠.

페리오이코이의 도시엔 자율권과 성소가 있었지만, 이들은 언제나 스파르타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의 도시에서는 나름대로의 지방법과 경제가 발전하기도 했지만, 스파르타와 경쟁할 정도로 번영하진 못했습니다.

스파르타와 페리오이코이를 이어줬던 주된 요소는 병역이었습니다. 페리오이코이는 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중장보병으로 복무하는 호모이오이 병력을 지원하곤 했습니다.

스파르타인과 페리오이코이는 로코이라는 부대에서 함께 싸웠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25년에 벌어진 필로스 원정을 묘사하며 아테네인들이 생포한 300명의 중장보병 중, 스파르타인은 12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스파르타인이 아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각주   [ + ]

1. 동등한 자
2. 농노
3. ‘데모스’
4. ‘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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