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스핑크스란?

스핑크스는 본래 왕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의 머리가 달렸고, 파라오의 예복을 입었으며, 사자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는 강력한 동물들의 특징, 즉, 그 힘과 재빠른 공격 능력, 위엄과 권위를 모두 갖춘 존재입니다.

이런 장점을 갖춘 스핑크스는 보호의 상징으로도 간주되었습니다. 스핑크스상의 드로모스를 따라 줄 지어 서있는 것은 신전으로 이어진 신들의 길을 보호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건설 목적 및 어떤 상징성이 있나?

수세기 동안 열성적인 애호가들과 역사학자들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스핑크스를 지었으며,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궁금해했습니다.

이런 의문들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현재까지 존재하는 많은 가설 중에서 특히 유력한 학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번째 학설은 제데프레가 자신의 아버지인 쿠푸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지었다는 설입니다.

스핑크스 동쪽 방면의 돌로 지은 신전은 그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카프레가 아버지의 신성한 위엄을 강화하기 위해 후대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신전은 이집트에서 최초로 태양을 향해 지은 신전으로 보입니다.


카프레의 유산?

또 다른 학설은 스핑크스를 지은 것은 카프레이며, 스핑크스는 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설입니다.

이 학설을 뒷받침하는 많은 주장은 스핑크스 신전의 주요 작업에 쓰인 석회암 층이 지리학상, 건축학상으로 카프레의 계곡 신전에 쓰인 것과 유사하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쿠푸 자신이 스핑크스를 지었으며, 후에 그의 후계자인 제데프레와 카프레가 완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스핑크스에 새겨진 글의 양식과 머리에 쓴 두건의 양식, 건설 당시 턱수염이 부재한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퇴색

비록 고대 이집트에서 남겨진 기념물과 조각상들이 전반적으로는 단색을 띠고 있지만,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러한 유물들이 고대에는 전부 채색이 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태양은 염료의 색을 바래게 하며, 모래와 기후, 무자비한 세월로 기자의 스핑크스가 갖고 있던 찬란한 색은 거의 파괴되었습니다.

12세기 아랍 이집트학자인 암둘라티프 알 바그다디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살았던 때에는 아직 붉은 염료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붉은 채색 흔적은 스핑크스의 양쪽 귀 근처에 있는 것이 유일하며, 두건에는 파란색과 노란색이 아주 미량 남아있는데, 두가지 모두 전통적으로 두건에 사용하던 색상입니다.

붉은색 염료는 인공 색소로, 점토와 규사, 아주 곱게 간 적철석을 포함한 다양한 재료를 섞어 만들었습니다.


붉은 색의 중요성

붉은 색은 고대 이집트에서 매우 상징적인 색이었습니다. 붉은색은 생명의 색인 동시에 죽음의 색이었으며, 사막의 모래와 태양의 광휘를 상징했습니다. 붉은색은 복수와 파괴의 신인 세트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붉은색을 일컫는 이집트어 ‘데서’는 사막을 뜻하기도 했으며, 하 이집트에서는 왕관을 지칭하던 단어였습니다.

예술 작품에서는 남성의 몸을 붉은색으로 칠했고, 여성의 몸은 노란색으로 칠했습니다.

채색 복원작업은 사이스 시대에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클레오파트라 치세보다 약 600년 앞선 시점입니다. 이것은 1858년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발견한 물품 목록 석판에 남은 기록으로 추정한 내용입니다.

유비소프트 : 이런 이유로 저희는 스핑크스의 본래 색을 전부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비록 스핑크스의 색은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엔 전부 바래버렸을 가능성이 크지만 말입니다.


기자의 대스핑크스

제4왕조 시절인 기원전 2600~2500년 경 건설된 기자의 대스핑크스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 중 가장 오래되고 큰 스핑크스입니다.

자연적으로 노출된 석회암을 깎아만든 스핑크스는 높이가 19.8m에 길이 73.2m, 너비 14m에 이릅니다.


석회암 사용

이 인상적인 건축물을 손질하기 위해 최초 건설 단계 이후에 석회암이 더 추가되었고, 그 후에도 스핑크스를 보존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이어졌습니다.

유비소프트 : 게임 상에 표현된 손질 상태는 현대의 복원 시도를 일부 반영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 여러분들께 기자 스핑크스를 보다 명확하게 시각화해서 선보이려 했습니다.

오늘날 기자의 스핑크스는 ‘두려운 자’로 불리는데, 이 이름은 아랍식 이름인 ‘아불 홀’을 번역한 것이며, 이 또한 콥트어 ‘발호바’에서 유래됐습니다.


천연 암석곶

기자의 스핑크스는 융기된 암석층을 그 자리에서 통째로 조각한 것입니다.

머리는 모카탐 고원의 봉우리로 만들어졌고, 몸통은 그 밑의 암반층을 조각해 만들었습니다.

스핑크스의 가장 큰 침식 원인은 풍화작용과 건설에 사용된 석회암의 품질 차이입니다. 지하수에 함유된 나트륨 성분 역시 암석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으로 지목됩니다.


천연 기반암

천연 기반암층이 스핑크스 몸통의 비스듬한 지층 부분에 드러나 있는데, 이 암석층은 주변의 석회암과 유사합니다.


스핑크스의 입구들

아득한 옛날부터 이집트인들은 스핑크스 깊숙한 곳에 무덤이 숨어있다고 믿었습니다.

스핑크스를 도굴하려는 시도는 제1 중간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후로 스핑크스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고, 이로 인해 스핑크스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들이 남았습니다.


뒤쪽 입구

파라오 시대에 만들어진, 12m 길이의 스핑크스 뒤쪽 입구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냈습니다. 투트모세 4세가 해당 통로를 막아버렸지만 이후 보물 사냥꾼들이 다시 열어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워드 비제가 이 통로를 다시 발견했으며, 최근 마크 레너가 통로의 지도를 제작했습니다.

스핑크스 뒤쪽에 난 이 입구는 여러 개의 공간으로 이어지는데, 크기는 각각 수m 정도이며 스핑크스 내부와 지표면 아래로 이어집니다. 유비소프트 : 저희는 이런 자료를 토대로 좀 더 추론해 보았습니다.


학설과 과학

최근 몇년간 기자의 스핑크스에 관한 중대한 발견은 없었지만, 여러가지 견해와 학설은 끊임없이 제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해주는 고고학적인 근거가 없어 아직까지 입증되지 않은 가설로 남아있습니다.


아누비스 학설

기자의 스핑크스가 가진 의미에 관한 첫번째 주요 학설은 스핑크스가 본래 아누비스 신의 상징물이었다는 설입니다. 이 학설을 뒷받침하는 주된 근거는 스핑크스의 머리가 몸체의 크기와 균형이 맞지않는다는 점입니다.

두번째 학설은 투트모세 4세의 비석에 2개의 스핑크스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또 다른 스핑크스가 존재했으며 나일강 건너편에 대칭 구조로 놓여있었을 것이라는 설입니다.

그러나 두 학설 모두 진위 확인은 불가능합니다. 애니머스가 실제로 개발되지 않는 한


스핑크스 재현

지난 수십년간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여러가지 과학적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중 제일 의미 있는 연구는 마크 레너 팀이 진행한 프로젝트로, 연구팀은 스핑크스를 포함한 기자 고원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조사했습니다.

이들이 만든 지도를 통해 스핑크스 건설 당시 사용된 재료들을 확인하고 침식이 일어난 층을 분석할 수 있었고, 훼손되기 쉬운 영역을 파악해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유비소프트 : 저희 제작진은 스핑크스의 예술적 균형을 맞추려고 몇번 시도한 끝에 사진 측량 방식으로 제작한 지도를 사용하여 스핑크스의 비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로 했습니다.


아멘호테프 2세의 부활

기자의 스핑크스가 무엇을 상징하기 위해 건설 되었는지와 신 왕국의 이집트인들이 스핑크스를 어떻게 생각 했는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입니다.

본래 사자의 힘을 지닌 왕을 표현했던 스핑크스는 궁극적으로는 가장 신성한 존재의 상징 그 자체로 여겨졌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신 왕국 시대의 왕들은 기자의 스핑크스를 이집트의 왕을 알아보고 정당한 통치자로 인정하는 존재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기자의 스핑크스가 본인의 재위 기간에는 그 일부가 모래 속에 파묻혀 있었지만, 아멘호테프 2세는 그 조각상이 아주 중요한 존재임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테페트

아멘호테프 2세는 스핑크스이자 호레마케트를 위한 두번째 신전을 지었고, 자신의 선조인 쿠푸와 카프레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당시 왕조에서는 왕실의 일원들이 스핑크스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흔한 일이었습니다.

스핑크스의 성소는 ‘선택 받은 장소’라는 뜻의 세테페트로 불리게 됩니다.


표식 남기기

이집트학자인 마크 레너는 아멘호테프 2세가 스핑크스의 두발 사이에 자신의 조각상을 지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 했고, 셀림 핫산이 발견한 비석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해당 왕조에 재위 했던 다른 파라오들, 예컨대 투탕카멘과 람세스 2세 또한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심지어 인근의 신전과 피라미드에서 돌을 가져오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아멘호테프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투트모세 4세가 대표적 인물입니다.


투트모세 4세와 스핑크스

스핑크스의 두 발 사이에서 자던 훗날의 투트모세 4세는, 꿈 속에서 호레마케트 신에게 자신이 두 땅의 왕이 될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난 후 스핑크스를 뒤덮고 있던 모래를 전부 걷어냈고, 신의 화신으로부터 피라미드를 지키고 있던 스핑크스가 다시는 사막의 모래에 휩쓸리지 않게 관리했습니다.


꿈의 비석

15톤짜리 ‘꿈의 비석’은 투트모세 4세가 자신이 꾼 꿈을 기념해 세운 것으로, 이탈리아의 이집트학자 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빌리아가 1818년, 또 다시 모래에 파묻힌 스핑크스를 파내던 중 발견했습니다.

카빌리아는 스핑크스의 내부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던 중, 두 다리 사이에서 야외 예배당과 비석들을 발견했습니다. 의식을 치르고 남은 재가 여전히 남아있었는데, 모래가 보호한 덕분에 로마 시대에 있었던 마지막 의식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것으로 보입니다.


스핑크스의 턱수염

같은 해에 카빌리아는 스핑크스의 수염 조각들도 발견했는데 신 왕국 시대에 붙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조각들은 대부분 카이로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지만, 한 점은 대영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데, 스핑크스의 머리 장식에 달려있던 뱀 휘장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수염 조각이 소실되지 않고 남아있던 이유는 스핑크스의 머리 아래에 있었다고 추정되는 아멘호테프 2세의 조각상 덕인 것 같습니다.


사라진 코

전해 내려오는 일화에는 기자 스핑크스의 코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대 때, 프랑스 병사들이 훈련 중 쏜 대포에 맞아 소실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훈련이 있기 전에 기록된 비문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이미 스핑크스는 코가 없었다고 하니, 프랑스 훈련 이전에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상 파괴 행위

가장 유력한 가설은 독일의 역사학자 울리히 하르만의 연구를 토대로 제시된 설입니다.

1980년대에, 하르만은 아랍인들이 남긴 중세 시대의 자료를 수집했고, 그 결과 스핑크스의 한때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홍수와 농작물을 지켜주는 길한 신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378년 경, 모하메드 사임 알 다하르 라는 이름의 수피파 신도가 스핑크스 숭배에 반대하여 우상을 파괴한다는 명목으로 스핑크스의 코를 파괴했으며, 해당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후 스핑크스를 훼손한 죄로 스핑크스의 다리 사이에서 목이 매달린 채 화형 당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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