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브리오 은광

라브리오 광산 개관

고대 그리스에서 은광은 매우 드물었고, 그랬기에 그 중요도는 갈수록 높아져만 갔습니다.

기원전 6세기 말엽, 아테네는 라브리오 은광을 채굴하기 시작했고 채굴한 은으로 화폐를 주조했습니다.

광산의 생산량은 풍부한 광맥이 발견되었던 기원전 485년에 폭발적으로 치솟았죠.

광산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은 덕택에 아테네는 그리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살라미스 해전에서 페르시아를 이길 수 있을만큼 거대한 함대를 건조하기위해 필요한 자원도 제공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아테네가 그리스의 초강대국으로 거듭나는데에는 라브리오 광산이 크게 일조했다는 거죠.

아테네 주화들의 제작 시기는 기원전 530년 경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라브리오 광산에서 채굴한 풍부한 자원 덕분에 아테네 시에서는 질 좋은 은으로 유명했던 주화를 많이 주조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의 통화처럼 아테네의 주화에도 다양한 가치와 무게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장 많이 주조된 주화는 테트라드라크마로 17.20g 무게였습니다.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주화의 가치는 드라크마의 4배1)테트라에 달했습니다.

가장 작았고, 또 아고라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었던 주화는 트리오볼2)2.15g, 오볼3)0.72g, 헤미오볼4)0.36g이었습니다.


고대 광산

광산 자원을 채굴하기 위해선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습니다.

필요 수준의 노동력을 공급하는 동시에 비용을 줄이기 위해 아테네는 시민들에 대한 광산 임대를 허가했죠.

시민들이 보유한 노예는 물론, 가난한 일용 노동자들이 대부분의 노동을 수행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만 해도 1만~3만명의 사람들이 라브리오 광산에서 노동했습니다.

노동자들은 한해에 도합 20톤 가량의 은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는 금, 은, 구리, 주석, 납, 철, 수은과 같은 다양한 금속을 채굴했습니다.

가장 귀한 금속인 은과 금은 품질과 희귀성 때문에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은과 금은 주화를 만드는데 사용되었지만, 보석, 기타 사치품, 심지어 금과 상아로 만들었던 아테나 파르테노스 조각상 같은 조각들을 만드는데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금속은 주괴의 형태로 거래되었습니다.


광석 채굴

라브리오 광업은 2단계로 나뉩니다.

우선은 광석을 채굴하고, 그 후 정제하는 단계를 거치는 거죠.

4g의 순수한 드라크마 은화를 주조하려면 16kg의 원광이 필요했습니다.

광산에서 발견된 유물은 광업 절차의 세부내용에 대해 짐작할 수 있게 해줍니다.

우선은 광맥에 이르기까지 갱도를 파내야 했죠.

비좁은 갱도는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작업공간을 마련해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손으로 작업해야 했기에, 하루종일 파도 몇cm 정도 밖에는 파내지 못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침내 갱도가 광맥에 도달하게되면, 광물을 추출한 뒤, 돌절구에서 부숴 세광작업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스파르타는 데켈리아를 점령한 뒤 요새화하여 아테네의 주요 도로를 차단했습니다. 라브리오 광산의 노예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2만여명의 노예가 광산에서 도망쳤습니다. 이로 인해 라브리오 광산의 은 채굴은 중단되고 말았죠.

라브리오 광산의 폐쇄는 아테네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아테네의 보물창고는 점차 비어갔고, 함대를 재건할 자금도 남지않게 되었습니다. 자원이 고갈된 아테네는 금화를 주조하기 위해 아테나 니케의 조각상 2점을 녹여야만 했습니다. 도시는 테트라드라크마를 위조하여 대체하기 위해 은박을 입힌 청동 주화를 주조하기도 했는데,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행동을 비난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기원전 404년에는 사실상 은 채굴이 중단된 상태였죠. 사업가들의 광산 임대는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기원전 37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재개되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이 원정을 통해 막대한 양의 페르시아 은을 손에 넣게되며 은의 가치는 급락했고 광산의 채굴량으로는 더이상 운영비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광장

광산 노동자들은 세광장에서 광물에 붙은 암석을 씻어냈습니다.

세광 과정에는 막대한 양의 물이 필요했지만, 라우리온은 건조한 것으로 악명 높은 지역이었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기의 빗물을 수집하고 보관하기위한 수조가 광산지역에 설치되었습니다.

충분한 물이 모이면 노동자들은 암석과 광석이 들어있는 나무통에 물을 부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무거운 광석에서 비교적 가벼운 암석 알갱이를 분리했고 가라앉은 광석은 나무통의 파인 곳에 남았죠.

막 세광작업을 마친 광석은 정제하기위해 따로 모았고, 물은 다음에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수조로 흘려보냈습니다.

물을 사용해 광석과 돌을 분리하는 개념은 오늘날의 금 광부도 여전히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용해와 회분

헹궈낸 광물이 마르고나면 용해작업을 거칠 준비는 끝난 것이었죠.

용해는 광석으로부터 은을 추출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광석은 가연성 숯을 채워넣은 원추형 용광로에 넣어 용해됐죠.

용광로의 온도는 풀무로 공기를 불어넣으며 조절했습니다.

내부에서 광석이 타면서 유독성의 연기가 굴뚝을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광재로부터 분리된 은 합금은 따로 모아 정제의 마지막 단계인 회분작업을 거쳤습니다.

회분법을 통해 은에 남은 납을 제거하는 것이었죠.

용해된 합금은 골회로 만들어 흡수력이 좋은 회분로에 담아냈습니다.

그 후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회분로가 납을 빨아들이고 순은만이 남게 되었죠.

용해와 회분을 위해 사용된 용광로에는 막대한 양의 연료가 필요했습니다. 비슷한 조건에서 개발된 남미 은광의 흔적을 고려했을때, 고대 그리스 광산에서 1톤의 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1만톤의 목탄이 필요했을 거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노동자

라브리오 광산은 아테네 시의 소유였으나, 도시는 개인 자격의 시민들에게 3~10년간 이 지역에서 채굴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곤 했습니다.

시민들은 노예들과 가난한 일용직 노동자들을 모아 대부분의 작업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위험한 작업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기대 수명은 3~5년 정도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짧았습니다.

노동자들은 유독성의 납 증기와 폐를 옥죄어오는 갱도의 먼지라는 위협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식사가 제공됐고, 이들의 노동력을 통해 한해에 대략 20톤에 달하는 은을 채굴할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정치가 니키아스는 소시아스라는 이름의 트라키아인 노예를 1달란트에 구매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6천 드라크마에 달하는 가격으로, 일반적인 노예 가격의 30~40배에 가까운 가격입니다.

소시아스의 몸값이 비쌌던 이유는 소시아스가 은 광맥 탐사의 전문가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니키아스는 자신이 이미 라브리오 은광에서 노동하도록 파견한 노예 1천명의 관리를 소시아스에게 맡겼습니다.

리시아스에 따르면, 니키아스는 광산 사업을 통해 도합 100달란트의 부를 축적했고, 투자는 결국 성공했습니다.

각주   [ + ]

1. 테트라
2. 2.15g
3. 0.72g
4. 0.3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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