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체 17의 메모

아, 아… 어… 녹음이 되려나? … 이 폰으로 몇번씩이나 녹음할 줄은 미처 몰랐네…

어… 안녕, 아빠… 저, 예, 우리 모두 뉴욕에 있어요. 모텔이에요… 사실 퀸즈예요. NQ에서 가까운 아스토리아요. 레베카 꺼는 이상하게 배터리가 다 떨어져가고, 션은 맨날 그러듯이 자기 방에서 뭘하고 있어요… 나가서 식사라도 좀 하세요…

저요?… 재무부 관련 사무실에 자리를 알아보려고요… 옛날에 아빠가 시키던 훈련을 받는 기분하고 비슷해요… 한 10년 됐죠? 그때 아빠가 나타나서… 어… 내가 기운이 팔팔하니까 공놀이도 하고, 음모론이나 편집증 얘기도 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빠 말을 믿어요. 한마디 한마디 다…

지금은 아빠가 아는 것보다 제가 아는 게 두배는 많을 걸요. 제가 얼마나 많은 걸 목격했는지 절대 모르실 거예요. 지난 몇주동안만 해도 엄청나게 많은 걸 알아냈다고요. 진짜로 다 알아냈어요. 진짜 한… 1000살은 먹은 것 같아요. 아니, 한 10000년쯤 산 것 같아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운데, 그렇게 많은 사람을 통해서… 이 세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그냥 슬퍼져요… 그렇게 훌륭하고 지적인 사람들이 똑같은 전쟁을 또 하고 또 하고, 똑같은 실수를 또 하고 또 하고… 문화며 지식이며 역사… 이런 것들이 유전자를 통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기초부터 다시 배워야 하잖아요. 어떻게 살아야하고, 어떻게…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고, 어떻게… 옳은 것을 위해 이겨내야 하고… 하지만 세대가 이어지면서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리고, 또 너무나 많은 걸 보태고… 그러잖아요. 참 부끄러운 일이에요… 모든 걸 다시 배우고 또 다시 배우고 해야 한다는 게…

아빠, 클레이를 만났어요. 클레이 카츠마렉이요. 애니머스에서요. 앱스테르고 때문에 알게 됐죠. 16번 실험체였으니까… 내… 어… 전임자인 셈이죠… 클레이가 내게 여러가지를 보여줬어요. 나한테 넘겨준 거예요. 죽기 바로 전에, 아니 삭제되기 바로 전이라 해야 하나요? 아무튼… 클레이가 배운 것들, 클레이가 본 것들…

아, 세상에, 그 느낌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러니까, 어… 아빠가 클레이를 훈련시켰죠? 제가 떠난 후에요. 클레이는 아빠를 진짜로 우러러봤어요. 이제 클레이의 눈을 통해서 보니까, 왜 그런지 알 것 같아요. 제가 없을때였지만 아빠가 클레이를 데리고 있었다는 게 기뻐요… 하지만 클레이가 제게 보여준 것들은… 도저히 믿기 어려워요… 저는 절대… 제길, 잠깐만요…


아, 아, 어… 지난번에 녹음하고 몇주가 지났네요. 죄송해요. 아니 뭐, 녹음상으로는 몇초밖에 안지났지만. 그냥 다음 파일로 넘어간 것뿐이니까요… 음… 아무튼…

아참, 클레이 카츠마렉 이야기를 했었죠. 16번 실험체. 그러니까 제가 이탈리아에서 코마 상태에 빠졌다가 애니머스 검은방에서 깼을 때인데… 너무… 너무 조용했어요. 무슨… 깨어났는데 꿈속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내가 알고 있던 일들은 실제로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는 느낌… 이제 일어나면 또 하루는 날씨 얘기를 하며 커피를 마시고, 또 하루는 양다리 걸친 여자 중 누구를 버리나 고민하고… 또 하루는 나라는 인간은 왜 이러냐 후회하고… 그런 느낌인데…

어… 클레이를 봤어요… 거기 앉아서요… 그게… 그게… 복구되는 중이더라고요. 아시죠? 한조각씩 한조각씩… 그리고 나한테 루시 이야기를 할때… 아 젠장, 아시죠… 되게… 되게 아프다고요. 내가 그녀를 죽였다는 걸 깨달을때, 그런데도 아무 생각도 느낌도 안드는거. 그때는 아니지만… 아무튼요…

아무튼, 그때부터 기억이 하나씩 쌓이는 거예요. 에지오에 대한 기억, 알타이르, 그리고 최초 문명… 그리고… 클레이가 사라지기 직전에 자기 기억을 넘겨줬어요… 나한테… 자기가 보고, 자기가 살면서 겪었던 기억 전부를… 복잡하진 않았지만, 압도적이었어요… 말로 설명은 잘 안되지만…

클레이는 아담과 이브도 잠깐이나마 봤고, 그들이 노예생활에서 탈출하는 것도 봤어요… 최초문명과 인류 사이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과 그 끝도 목격했고… 미네르바, 유노, 티니아가 그… 계산을 완성하려 애쓰는 것도 봤어요… 그들은 그걸 계산이라고 부르더라고요… 도구가 있었어요… 강력한 기계… 그걸로 가능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확률상의 미래를 예측하는 거예요…

그리고… 참, 미래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를 만들어내는데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투자했어요… 자기들 것과 우리것을…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가장 가능성 높은 후보를 알아낸 것 같아요… 데스몬드라는 남잔데 서력기원으로 21세기 초엽에 살던 사람이에요…

하지만 데스몬드가 어디 한둘이에요? 그러니까 확률이란 건 참 웃긴거죠… 가지가 여러 수십개 뻗어나가버리니까 내 여러가지 버전중에서 어느게 필요한건지 모르는 거예요… 일찍 결혼해서 아들 하나가 있는 데스몬드가 그 데스몬드냐… 아니면 뉴욕에서 미혼으로 사는 데스몬드냐… 아니면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가서 웨이터가 된 데스몬드냐… 어쩌면 시카고에서 자동차 대리점 직원으로 일하는 데스몬드일지도 모르죠… 아니면… 어… 처음부터 부모님 곁을 떠나본 적이 없는 제가 그 데스몬드일지도 모르고요… 최초문명에는 선택할 변수가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결국은…그 행운아가 저였죠. 제가 그 계산이 뱉어낸 그 데스몬드예요… 그들이 남긴 메시지에 나오는 데스몬드가 바로 저였어요… 이제부턴 그런 명예를 지니고 살아야겠죠… 참 대단한 명예네요… 좀 피곤해서… 다음에 또 녹음할게요… 안녕.


안녕 아빠.

어… 사실 생각하면 웃겨요… 제가… 아빠에 대한 기억이 있다는 게… 대체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던건지… 일할때면 항상 생각을 해봐요… 아니면 자기 전에도요…

왜냐하면, 그게… 어… 뭔가 안심이 되거든요. 어… 아마 제가 14살 때였나 본데… 아빠가 제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 법을 가르치려 하셨어요… 기억나세요?

제가 돌아다닐 때 얼마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걸었는지… 아주 간단한 건데… 지금은 이해하지만, 그땐 진짜… 솔직히 말해서… 아빠가 바보 멍청이 갈았어요… 그래서… 어… 아빠가 나중에 저더러 제 방에 가서 등을 문에 기대고 앉아서 책을 읽으라고 하셨죠… 최소한 15분동안…

그런 다음 소리 없이 일어나서 아빠가 모르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겨 보라고 하셨어요. 그… 심지어 그때 읽었던 책도 기억나요. 존슨 선장 이야기였어요. 그리고 아빠가 경고하셨죠… 아빠한테 들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그리고 아빠는 가셨고… 저는 기다렸어요…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4시간을 기다린 다음 이제 가봐야겠다고 결심했죠… 하지만 그때도 계단 아래까지 조용히 내려가는 데 20분이 걸렸어요.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또 30분이 걸렸고요. 복도까지 가는데 또 10분이 걸렸고… 드디어 문에 닿았죠…

그리고 아빠 방 안을 몰래 들여다봤어요… 아빠가 주무시고 계셨기를 진짜 간절히 바랐어요… 그런데 천만에요… 전혀 아니었어요… 아빠는 계속 책을 읽고 계셨죠. 그래서 속으로 욕을 할 뻔했어요.

10분 후에는 아빠하고 거리가 불과 3m였어요… 그때 제가 한쪽 발을 내려놓았고, 아빠가 움찔하셨죠… 정말 살짝 내려놓았는데 아빠가 움찔하셨어요. 저는 제가 상상한 건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뇨, 아빠는 제가 내는 소리를 들으신 거였어요…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죠. 그냥 시계를 들여다보시고, 술잔을 집어들고 한모금 마시셨어요. 그런 다음 다시 책을 읽으셨죠.

하지만 저는 제가 실패했다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아빠는 아무 말씀도 안하셨죠. 저, 저, 저는 도대체 이해를 못했어요. 그래서 저는 그냥 아빠한테 달려들어 어깨를 두들겼어요. 그러자 아빠가 돌아보셨죠. 그리고 “와! 놀랐구나!”라고 하셨어요. 그러고는 저를 와락 끌어안아 주셨죠… 그리고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빠… 아빠, 전 진짜 화가 났어요… 저는 아빠한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고요… 난, 난 실패했는데… 그리고 아빠도 그걸 알고 계셨어요… 하지만 아빤 아무 말씀 안하셨죠. 그래서 전 계속 화가 나 있었어요. 한달동안을요. 아빠가… 아빠가 저를 어린애 취급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빠가 그때 쟤는 내가 원하는 사람이 절대 되지 못할거라고 결정을 내리신 거라고 저는 생각했던 거예요…

하지만 저는 몇년 전에야 깨달았어요… 아빠가 시계를 보시던 동작… 그게 힌트였어요, 그렇죠? 아빠는 제가 이기게 해주신 거예요. 왜냐면… 제가 그렇게 참을성을 발휘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빠는 감동하셨을 거예요… 아마도 그순간만큼은요…

그순간만큼은 저의 스승이 아니라 아빠가 되는 게 낫다고 판단하셨을 거예요… 저는… 저는 진짜 모르겠어요… 그 둘은 하나이자 또 같은 존재였을지도… 어느쪽이든 간에 저는 제 스승님과 제 아빠 모두가 그날 저를 지켜주셨다는 사실이 행복해요…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아요…


이번은 좀 짧을 거예요, 아빠…

남쪽으로 가게 되면, 그래서 그 사원에서 못 나오게 되면 나를 기억할만한 걸 남겨놓으려고요. 이런 일은 아무리 낙천적이 되려해도 저, 저는 불가능해요…

온종일 코너의 기억 속에서 지낸다고 생각하면 불안이 밀려와요. 코너의 기억은 고통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거든요. 코너는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때도 희망을 잃지 않고 있지만요.

저는 그냥 우리가 하는 일이 옳은 일이라고 믿을 뿐이에요. 이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저런 기술이 우리 눈앞에 버티고 서서 사용해주기를 바라잖아요. 그리고 저는 그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고요. 제 유전자 속, 또는 제 기억 속 뭔가가, 암호의 마지막 조각이 저 전체를 움직이는 스위치가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깄는 거고요… 그래서 저들이 절 여기 데려온 거고요.

다만… 음… 음… 저는 그 대신 뭘 포기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분별력? 삶? 말하기가 어렵네요. 이것이… 템플기사단과의 싸움이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는 건 알아요. 저 사원 안에 뭐가 들어있든, 결말은 아닐 거예요. 이… 이 끝없는 이야기의 또 다른 챕터겠죠. 그리고 그 페이지를 계속 넘기는 게 아빠의… 그리고 엄마의… 그, 그리고 션과 레베카의 일이겠죠.

저는… 오손 웰즈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올라요. 그… 해피엔딩을 원하면 이야기를 어디에서 끝내야할지를 알기만 하면 된다는 그 말이요… 그러니까 어쩌면… 어쩌면… 해답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사람들이 계속 앞으로 나가는 건지도 몰라요… 만일 뭔가 잘못된다면… 아빠… 저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래서 몇년 후에 제 이야기를 하시게 된다면… 제가 어떻게 방향을 잃었는지, 그러다 어떻게 다시 찾았는지, 그래서 어떻게 때맞춰 이 세계를 구했는지를 얘기해주세요… 그리고… 그냥…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세요. 그러면 모두 웃는 결말이 나오잖아요.

이제 안녕, 아빠. 엄마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네? 아… 그리고 제가 두분 다 사랑한다고도요… 두분 다 사랑해요.


[실험체 17 검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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