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티유로의 진격

1789년 7월, 빵 값이 전에 없이 치솟으며 파리는 폭발 직전의 상태로 위태로워졌다.

─당시 기준으로는 ‘봉기’라거나 ‘폭동’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루이 16세가 재상을 해임시켰다는 말이 돌자, 이는 곧 각료들 가운데 보수적인 세력이 곧 쿠데타를 일으킬 조짐으로 받아들여졌다. 급진주의자들은 세느 강의 좌안으로 향했고, 이곳의 앵발리드 기념관1)파리의 상이 군인 병원에서 4만명의 총사를 포위하고 무기를 획득했다. 그러나 화약과 탄환 등 군수품이 없자, 혁명주의자들은 바스티유로 나아가게 된다. 바스티유 감옥은 당시 화약 3만 파운드와 총알을 보관하고 있었다. 교도소 주둔군의 지휘자였던 베르나르 르네드 로네는 100명이 채 되지않는 퇴역군인과 스위스 근위병을 지휘하여 1000명 가량의 혁명주의자들을 상대로 바스티유를 지켜야 했다. 드 로네는 항복을 거부했으나, 그가 지휘한 군대는 얼마 되지 않아 항복했으며 화약을 약탈당했고 바스티유에 수감되어있던 7명의 죄수들도 석방되었다. 라 로슈푸코 공작이 바스티유 사태에 대해 보고하자, 루이 16세는 “반란인가?”하고 물었고 공작은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거나 그거나지 뭘. 반란(revolt)이나 혁명(revolution)이나 써놓고보면 비슷하다.─

각주   [ + ]

1. 파리의 상이 군인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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