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학살

1792년의 군사 상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독일군 총사령관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프랑스 영토로 진군하기는 했지만, 1792년 9월 2일, 베르 됭에서 실패하며 프랑스의 반혁명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상황은 마치 다모클레스의 검처럼 파리의 머리 위에 위협적으로 걸려있었고, 혁명주의자들은 반대세력을 급진적으로 숙청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 가운데 마라가 있었다. 그는 “모두 일어나라! 일어서서 반역자가 피를 흘리게 하라!”며 선동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당통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적을 쳐부수기 위해서는 첫째도 배짱, 둘째도 배짱이다. 배짱이 있어야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아주 배짱이 넘치는 말이야. 배짱의 화신이라 할만해.━

당시 감옥에는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는 성직자 또는 귀족 출신이어서, 혁명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이었으며 또 일부는 일반적인 범법자, 또는 미치광이였다. 감옥에는 파리로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는 반대세력이 몸을 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인해, 혁명세력은 혁명에 적대적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이들이라도 가리지 않고 죽이기 시작했다.

1090명에서 1395명에 이르는 죄수들이 학살 당했다. 일부는 이런 징벌적인 폭력조치가 불가피했다고 항변했지만, 이 학살 사건은 파리지앵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파리에서 일어난 사태와 관련하여 수도 외의 지방에서는 이를 불인했고 공포를 느꼈지만, 이들 또한 잠재적인 적대세력에 대해서는 위협을 가하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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