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앤 디즈레일리

출생 1792년 11월 11일

ACS_DB_Mary_Anne_Disraeli벤자민 디즈레일리의 부인인 메리 앤 디즈레일리(결혼 전 성 : 비니)는 19세기 전체에 걸쳐 영국 상류 사회의 중요한 인물이다. 메리는 1839년에 첫 남편이 사망한 직후 벤자민 디즈레일리와 결혼한 후 죽을때까지 그의 동반자, 친구, 조언자 역할을 했다. 그녀는 어리숙하고 덜렁대는 태도로 ‘점잖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이라면 질겁을 할만한 이야기들을 즐겨했지만, 내면으로는 예리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반된 성향 때문에 “벤자민은 돈 때문에 그녀와 결혼했지만, 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건 사랑 때문이야.”라는 농담이 생기기도 했다.

─결혼 당시 메리 앤이 가난했다는 걸 고려한다면 꽤 재밌는 농담이다.─

하지만 매우 낭만적이었던 디즈레일리 부부는 결혼 초기에는 아주 힘들었다. 벤자민은 엄청난 액수의 빚을 오랫동안 메리에게 숨겼으며, 결혼에 대해 공공연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빅토리아 시대의 신문에서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그러하듯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디즈레일리 부부는 자신들의 결혼이 늘 꿈꿔왔던 낭만적인 이야기로 자리잡을때까지 문제를 해결하고 관계를 굳게 다지면서 관습을 다시 한번 조롱했다.

1868년에 빅토리아 여왕이 벤자민에게 작위를 수여하려 했지만 벤자민이 하원에 머물겠다고 했을때는 메리 앤이 나서서 이를 수락하여 자신도 자작 부인이 되었다. 언제나 그러했듯 그녀는 빅토리아 사회에서 용인되던 기준을 따르기를 거부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궁전에서는 여왕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었고, 상위 귀족 반열에 오른 후에는 한때 자신을 경멸하던 여인들에게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빈곤층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도 했으며, 정치적 감각을 활용해 남편과 선거 활동을 벌이며 과감한 정치적 결단으로 유권자의 호감을 샀다. 사망 시에는 모범적인 부부가 보여줄 수 있는 행복, 만족 및 성공의 대표적 예로 칭송을 받았다.

메리 앤 디즈레일리는 몇년 후 사망한 남편 벤자민과 함께 버킹엄셔 휴인던의 ‘성 미카엘과 천사들’ 교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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