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미라보 백작

ACU_Mirabeau_Render르 비뇽에서 태어난 미라보는 어린 시절 지독한 천연두를 앓았으며, 그 때문에 평생 얽은 얼굴로 살아야 했다. 미라보의 가족은 상당히 부유했고, 부친은 그를 위해 기병대 장교직을 주선해 주기도 했으나 그에게 군대는 적성이 아니었다. 젊은 미라보는 상관인 대령의 부인과 불륜 관계를 맺었고, 이 사실이 들통나자 미라보의 부친은 아들을 일 드레에 있는 감옥에 가둬버렸다. 미라보는 그 후로도 빚을 독촉하는 채권자들과 아내를 뺏긴 성난 남편들 때문에 감옥을 들락날락하며 보냈다.

주 요새에 수감되었을 때에는 교도소장의 아내를 유혹하여 같이 달아나기도 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정착했을 때는 각종 오컬트 협회에 열심히 참석했다. 이후 경찰에 체포되어 뱅센의 성에서 3년에 걸친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프랑스 사법부의 자의적 본성을 비난하는 글을 썼고, 동시에 포르노 성향이 짙은 에로티카 비블리온 같은 작품도 썼다. ─여기서 한마디 하자면, 이렇게 여자하고 침대에 들어가는 일만 생각하고, 전쟁은 피하려 하고, 에로틱한 글을 쓰는 반체제주의자 제비족은 사실 프랑스 남자 중에선 흔한 편이야.
그러니까 미라보는 프랑스 남자의 진정한 모습을 새로이 조명하게 했다고 해야겠지.
여기서 ‘프랑스 남자의 진정한 모습’이란 미라보의 프랑스인다운 수준을 말하는 거지, 프랑스 남자로서의 모습은 아니…
아니, 뭐 그거나 그거나 같은 말이지.─

뱅센에서 출소한 뒤 미라보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 스위스 뇌샤텔에서 망명 중인 이른바 ‘제네바 혁명파’를 만난 것이었다. 그 중에는 파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재정가 에티엔 클라비에가 있었다. 이 재능 있는 남자들이 미라보가 만든 단체와 정치 이념의 기초 역할을 했다. 이들이 글을 쓰면 미라보는 그 끝에 서명을 했다. 미라보가 어마어마한 양의 글을 썼던 것은 이런 시스템 덕분이었다. 1)사실 정치가들은 옛날부터 이렇게 고스트 라이터를 활용했다. 미라보는 은행가에게 돈을 받고 다른 은행가의 은행을 공격하는 글을 썼고, 이런 식으로 막대한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당시 프랑스 대신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을 공격하는 글을 쓰는 바람에 프랑스 국왕의 체포 영장이 발부되어 프러시아에서 또다시 옥고를 치렀고, 이곳에서 “중간 계급은 하층 계급과 연합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찌되었던 귀족층은 이 기묘한 성향의 미라보 후작과 엮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미라보는 제3신분인 평민을 대표하여 삼부회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미라보의 ‘정치 활동’의 배경은 그의 친구들이 만든 것이었고, 미라보는 뛰어난 웅변으로 친구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 이후 미라보의 삶은 잘 알려져 있다. 미라보는 1789년 10월부터 국왕에게 은밀히 돈을 받고 프랑스 왕정을 옹호하는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국왕은 그의 조언을 한번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이 16세가 비밀 서신들을 감춰두었던 튈르리 궁의 비밀 금고가 발각된 일은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 서신들 중에는 미라보가 국왕에게 매수되어 내통했음을 보여주는 편지 외에도 받은 돈의 내역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 미라보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지 16개월이 된 상태였다. 무절제하고 방탕한 생활 때문에 악화된 건강으로 사망하기 전, 미라보의 마지막 연설문을 탈레랑이 읽은 바 있지만 사실 이 연설문은 제네바의 목사였던 에티엔 살로니옹 레니바즈가 작성한 것이었다.

각주   [ + ]

1.사실 정치가들은 옛날부터 이렇게 고스트 라이터를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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