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교육 – 철학

철학과 그리스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라는 단어는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 필로소피아에서 비롯된 단어입니다.

이 개념은 돈에 대한 사랑을 뜻하는 필로크레마티아나 명예에 대한 사랑인 필로티미아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죠.

기원전 5세기 후반부 즈음, 아테네는 그리스 철학의 수도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민주주의의 발전 덕택에 초등교육에 해당하는 기본 항목을 넘어서는 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었죠.

아테네 시민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사안에 참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공직 선출, 새로운 법의 입안, 군사적 결정 참여, 혹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위한 활동 같은 사안들 말입니다.

그리스 철학은 기원전 7~6세기 이후의 이오니아에서 탄생했습니다. 자연 철학에 매진했던 최초의 철학자들은 피시코이 혹은 피시올로고이라고 불렸습니다.

피시코이의 담화록은 시의 형태로 기록되어 호메로스의 시와 유사했습니다. 하지만 신과 신화라는 측면에서 세상을 설명했던 서사시와는 달리, 피시코이는 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더 합리적인 원인을 찾았습니다.

자연철학 중에서 밀레토스 학파라는 학파를 창시했던 탈레스는 물이 모든 것의 본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탈레스는 물질적이고 합리적인 요소가 세상의 법칙이라고 설명했던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에페수스 학파도 자연계에 관심을 가졌죠.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만물이 로고스라는 논리적 구조에 연결되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에 놓여있다고 상정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우주의 제1 법칙은 불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군사적 확장과 정치적 문제로 인해 사모스의 피타고라스 같은 일부 이오니아 지식인들은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크로톤이라는 마을에 학파를 세웠고, 전설적인 레슬링 선수인 크로톤의 밀론을 비롯해 수많은 제자를 뒀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여러 수학적, 기하학적 발견을 성취했고, 죽음 이후 영혼이 환생한다고 믿기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모두 박식했습니다. 그들의 철학에는 우주론, 수학, 기하학, 의학, 윤리학이 혼재하고 있었고 후대의 철학자들은 모든 것을 아울렀던 선학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키노사르게스

본래 아테네엔 고등교육을 위한 공식적인 학교가 없었습니다.

궤변가와 철학자는 개인 가정이나 극장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장기적인 교육과정에 참여할 젊은 제자를 모집하기위해 젊은 아테네인들이 육체 훈련을 하는 김자니아에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키노사르게스는 아테네 남부 교외에 위치한 헤라클레스의 성소였습니다.

기원전 4세기 초에 안티스테네스는 이 성소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파했는데, 그 이름으로부터 냉소주의라는 의미의 ‘시니시즘’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죠.

페리클레스가 도입한 여러 문화정책들은 아테네를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 탈바꿈하게 했습니다. 그는 아낙사고라스와 프로타고라스를 비롯한 다른 지식인들을 도시로 초빙했습니다. 그 덕분에 아테네에서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많이 탄생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있었습니다.

철학에서 두각을 보였던 아테네는 그리스 전역으로부터 제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예를들어, 아리스티포스는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키레네에서 왔고, 디오게네스는 안티스테네스 문하에서 공부하기위해 시노페로부터 찾아왔습니다.

원래 철학자와 궤변가는 개인의 집, 김나지아, 공공장소에서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즈음에는 플라톤의 아카데미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리카이움을 시작으로 철학교육기관이 아테네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학당에는 정원, 스승과 학생, 손님을 위한 방, 그리고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철학자들이 기관 교육에 찬성한 것은 아닙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통 안에서 살며 공공장소에서 가르침을 전했던 견유학파의 디오게네스가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동안, 아테네에는 철학자, 책, 논쟁, 사유가 가득했습니다. 이는 아테네의 철학자들이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아누스의 칙령에 의해 추방됐던 기원후 6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가치관에 대한 가르침

모든 자유시민은 아테네의 민주주의 절차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흐름에 진정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출중한 연설과 수사학 기술을 갖춰야했죠.

이런 이유에 따라 많은 궤변가들이 논리, 사유, 웅변과 같은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이는 학생들이 아레테, 다시 말해 우수성을 달성하는 것을 돕기위해서였죠.

하지만 이 우수성이란 개념은 특히 다른 철학자들의 도전을 받았습니다.

일례로, 플라톤, 소크라테스, 이소크라테스는 도덕적 접근법을 선호했으며, 수사학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더 나아가 철학과 지혜는 단순히 유용한 도구가 아니라 윤리적 덕목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의 철학은 스스로 보여줬던 모범적인 삶의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40살이 됐을때, 델포이의 예언자는 소크라테스가 살아있는 사람 중 가장 현명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는 예언자의 말에 당황했고 신탁의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하기위해 자신보다 현명한 이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아테네에서 온갖 직종의 유명인들을 찾아다니며, 질문을 통해 그들의 지식을 시험했습니다. 그는 정치가, 연설가, 시인, 음유시인, 궤변가들을 찾아갔고 대화는 언제나 같은 식으로 진행됐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역설과 논박을 통해 거만한 전문가들이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돈, 명예, 위신을 가벼이 여기고, 대신 영혼을 풍족하게 만드는데 집중하라며 동료 시민들을 설득하려하기도 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철학은 유일한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저서를 남기지않았고 구술로 가르치는 편을 선호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철학은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그는 단벌옷을 입고, 항상 맨발로 돌아다니며 평생을 가난에 시달렸다고 전해집니다.

소크라테스의 공공연한 행보로 인해 그에게는 많은 적이 생겼고, 그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았던 아테네인들은 소크라테스를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솔직함과 지성은 많은 아테네 젊은이들을 끌어들였죠. 플라톤과 크세노폰과 같은 몇몇 젊은 제자들은 자신만의 철학 작품을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399년, 아테네 시는 도시의 신을 믿지않으며,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2가지 혐의를 들어 소크라테스를 기소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그에게는 독미나리로 만든 독약을 마시라는 형벌이 내려졌죠. 투옥 생활동안, 친구들이 탈옥을 권하기도 했지만, 소크라테스는 거부하고 도시의 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마지막까지 현명했던 소크라테스는 철학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하는 대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철학의 중요성

고대 그리스의 철학은 본질적으로 여러 영역에 걸쳐있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지혜와 논리 외에도 수학, 기하학, 음악 이론, 심지어 의학도 공부하고 가르쳤습니다.

예를들어, 철학자 프로디코스는 인간 생리에 대한 다양한 설명을 요약한 ‘인간의 본성’이란 논문을 썼습니다.

철학의 영향력은 의학에 영향을 줄 정도로 대단했습니다.

히포크라테스 의사들은 자신들의 작업에 철학적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논문 ‘공기에 대하여’는 우주의 근원이 공기라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입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는 기원전 388/387년, 아테네의 벽 바깥에 세워졌습니다. 입구에는 이런 내용의 명문이 새겨졌었죠.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으로 들어오지말라.’ 또한 플라톤에 대한 대화록에 따르면, 플라톤과 그의 학파에서는 수학공부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합니다.

플라톤의 학당에서는 피타고라스 계열의 철학자, 아르키타스, 기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크니도스의 에우독소스를 비롯하여 많은 수학자와 기하학자가 가르치거나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아카데미에서는 학생들에게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고안해낼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에우독소스가 고안해낸 행성 운행에 대한 수학적 모형, 그리고 플라톤의 사촌이자 아카데미의 학장 자리를 물려받았던 스페우시포스가 구상했던 기하학적 형태를 내포한 물리우주의 모형이 그 예시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궤변가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궤변가들과 모호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플라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동시대의 유명한 궤변가들과 꾸준히 부딪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한편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에서는 가르침에 대한 댓가를 꾸준히 요구하는 궤변가의 모습으로 소크라테스를 묘사했습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매우 가난했고 가르치면서 돈을 벌지는 않았습니다.

귀족 자제들만 가르쳤던 궤변가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신분에 관계없이 모두를 가르쳤습니다.

안타깝게도 소크라테스의 논쟁적인 사상과 방식은 아테네 시와는 어울리지 않았으며 결국 불경죄라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궤변가’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잘못되거나 그릇된 주장을 펼치는 행위와 연관되고 있죠. 궤변가라는 단어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은 궤변가들을 자신의 주적으로 여겼던 플라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하지만, ‘궤변가’를 의미하는 ‘소피스트’라는 단어는 지혜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소피아’에서 유래된 것으로 ‘현명한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궤변가들은 수사학이나 설득 같은 특별한 주제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던 새로운 전문집단의 대표격이었습니다. 이들의 가르침은 도덕, 정치, 종교와 같은 주제에 비판적인 사고를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하지만 궤변가들은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었고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신념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이들은 가르침의 댓가로 돈을 받았기 때문에 궤변가들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보통 귀족 가문이나 부유한 가문의 구성원처럼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궤변가들이 다양한 공개행사에서 자신의 기술을 선보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들어, 궤변가 고르기아스는 아테네의 전사자들을 기리는 장례식에서 연례 연설을 펼쳤고, 히피아스는 올림피아에서 여러차례 연설했죠.

일반적으로 최초의 전문적인 궤변가라고 여겨지는 인물은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였습니다. 진실이란 어느 한 측면으로만 제한될 수 없다고 여겼던 프로타고라스는 그의 제자들을 양쪽 관점 모두에서 토의할 수 있도록 훈련시켰습니다. 그는 ‘빈약한 주장도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진리는 상대적이고 개인마다 다르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는 신에 대해 불가지론적인 관점을 견지하며 전통적인 종교의 가치에 반대하기도 했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신들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아닌지, 혹은 무엇인지조차 알 도리가 없다. 주제 자체가 모호하고, 인간의 삶이란 덧없기 때문이다.”


고전기 철학자

철학은 단순한 사상의 집합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철학자 피에르 아도에 따르면, 고대의 철학자들에겐 정욕, 의심, 헛된 믿음과 싸우기위한 매일의 ‘양생법’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엔 죽음에 대한 명상, 자연에 대한 사색, 혹은 친구나 스승과의 대화가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철학자들은 특정한 복식 규정과 식단을 따랐습니다.

철학은 또한 스승과 제자 간에 형성되는 공동체의 일부였습니다. 이런 공동체는 학파의 형태로 만들어져 결속을 다졌습니다.

기원전 4세기 초에 플라톤은 아테네 외곽의 숲에 위치한 건물을 사며 이러한 학파를 설립했습니다.

이 학파의 목적은 학생들이 도시를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철학적 사고를 지닌 시민’으로 육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학파엔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었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열려있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84년 스타기라에서 태어났습니다. 17살의 나이에 아테네로 온 그는 아카데미에서 플라톤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는 플라톤이 사망했던 기원전 347년까지 학당에서 20년을 보냈습니다. 그리스를 돌아다니던 그는 기원전 343년, 필리포스 2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궁정에 정착해 어린 알렉산더 대왕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35년,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당인 리케이온을 세웠고, 이 학당은 도시에서 두번째 학습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학교의 구성원들은 페리파테티코스, 혹은 ‘주변을 걷는 자’라고 불렸습니다. 그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부지를 걸어다니며 학생을 가르쳤기 때문이거나 혹은 학교의 김나지움을 둘러싼 ‘페리파토스’란 도로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에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의 모델이 되는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연구는 방대한 규모로 진행됐고,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 제목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물리학, 정신분석학, 정치학, 동물학과 문학을 연구했죠. 유명한 제자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구에 동참했습니다. 에레소스의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과 암석에 대해 저술했고, 로도스의 에우데모스는 수학의 역사를 편찬했으며, 타렌툼의 아리스토크세노스는 화성학에 대한 책을 썼습니다.

알렉산더 사후, 불경죄로 비난을 받았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그는 기원전 322년에 사망할때까지 유보이아에서 몸을 피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1)에우다이모니아이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돈, 명예, 기쁨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다다르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인간을 동식물과 구분 짓는 요소가 이성인만큼, 인간의 목표와 기능은 이성을 사용하는데 있다고 봤죠. 따라서 행복한 삶이란 이성적인 삶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론적 탐구를 위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각주   [ + ]

1. 에우다이모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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