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민주주의

프닉스

아테네의 집회는 민회라고 불렀습니다. 1년에 40회 가량 프닉스에서 열렸으며, 도시의 여러 사안들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각각의 회의는 대개 몇시간동안 계속 되었죠.

프닉스란 단어는 ‘한데 뭉치다’에 가까운 의미라고 합니다.

이는 아마도 민회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과 관련되어 있을 겁니다.

프닉스를 가득 메운 시민들은 문자 그대로 어깨를 맞대고 뭉쳐있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모든 남성 시민들은 이 민주적 절차에 직접 참여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20세 이상이라면 발언권과 투표권이 주어졌고, 30세가 넘은 사람들은 높은 지위의 법관으로 선출될 수 있었습니다.

고전기의 아테네에는 대략 3만명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법안을 작성하거나 수용하기 위해서는 6천명의 시민들이 민회에 참여해야 했죠.

고대 그리스의 모든 도시가 민주정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실, 고전기의 도시 대부분은 과두정과 독재정 2가지 정부 형태로 운영되었죠.

과두정은 소수의 사람들이 통치하는 방식입니다. 과두정의 예로는 28명의 장로로 구성된 평의회가 정치 과정의 대부분을 통제하던 스파르타를 들 수 있습니다.

반면 독재정은 유명세를 얻게 된 지도자인 독재자가 통치하는 방식입니다. 주로 외부의 위협에 직면했을때 독재자가 도시의 통제권을 장악하곤 했죠.

아테네는 3가지 형태의 정부를 모두 경험했습니다. 기원전 546년까지는 정권을 잡기 위해 경쟁을 벌였던 몇몇 주요 가문이 통제 했던 과두정이었습니다. 기원전 546년에는 귀족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사병을 이용해 도시를 완전히 통제했고 그의 가문은 기원전 510년, 아테네에서 추방 당하기 전까지 독재자 자리에 올라 지배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 간의 갈등이나 또 다른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해 민주주의 설립되었습니다.


민주적 절차

민회가 열리면 아티카 10개 지구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민회는 프리타네이스라 불리는 행정 위원회가 주재했습니다.

모든 회합은 집회의 수호자인 제우스 아고라이오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민회가 진행되는동안 시민들은 프닉스의 강단에 서서 도시가 당면한 문제에 대한 연설을 펼쳤습니다.

이후 해당 사안에 대한 투표는 민회에 모인 사람들의 거수를 통해 이뤄졌죠.

민회에서는 곡물 수입, 예산안, 선전포고 등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민회에서 직접 법을 제정할 수는 없었지만, 시민들은 아테네 시의 운영 체제를 형성하고 관리할 입법자 임명에 관여할 수 있었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여인들의 민회’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아테네의 여성들이 도시 정부를 장악하고 사유 재산의 페지, 늙고 매력적이지 못한 여성들을 위한 성적 평등 강요라는 2가지 주된 변화를 꾀한다는 줄거리를 떠올렸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연극에서 여성의 민회 참여를 농담거리로 취급 했는데, 실제로 여성이 민회에 참여할 수 없었음을 감안하면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여성들은 여전히 종교적 의식이라는 형태로 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 폴리아스를 포함해 40개가 넘는 주요 교단의 신관들은 모두 여성이었죠. 데메테르를 기리기 위해 열렸던 테스모포리아 같은 일부 축제는 오직 여성만을 위한 축제였습니다.


법관

일부 시민들은 그저 민회의 결정 과정에 참여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몇몇은 법관으로써 민주적 절차에 더 깊이 관여할 수도 있었습니다.

법관은 30세가 넘은 아테네 시민 중에서 선출되었습니다.

법관들은 유능한 웅변가이자 흡인력 있는 정치가인 경우가 많았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때 일반 시민들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법관 중 하나는 큰 인기를 구가하며 15년간 법관의 지위를 유지했던 페리클레스였습니다.

이론상,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노동자에게 귀족과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야 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귀족의 영향력이 강했습니다. 이는 주로 귀족들이 정치적 동맹을 맺거나 자신의 위신을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기원전 5세기에는 귀족들이 여러 공직에 선출되었습니다. 그 일례로,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개혁의 선두에 섰던 정치가 페리클레스조차도 호메로스 서사시에 등장하는 영웅, 네스토르의 후예로 알려진 강력한 가문, 알크마이오니다이 출신이었죠.

기원전 429년, 페리클레스가 사망한 이후 옛 귀족 가문에 속하지 않는 새로운 부류의 지도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귀족을 대신하게 된 이들은 토지가 아닌 무역이나 작은 공방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지도자들과 대립했던 자들은 이들을 보통 사람들의 우두머리라는 의미인 ‘데마고게스’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초기에 등장했으며, 또 가장 잘 알려진 데마고게스는 클레온이었습니다. 그는 민중에게 배심원의 의무를 부여하는 등, 일반인에게 헤택을 주는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클레온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스파르타에 굉장히 공격적인 태도를 취했고, 거짓 고발로 반대자들을 쫓아내려 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참여

이론적으로 20세가 넘은 모든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민회에 참석할 권리가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일과를 거를 수 있을만한 여유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원전 4세기부터는 민회 참가를 장려하기 위해 미스토스 에클레시아스티코스1)민회 수당라는 특별 수당이 지급되었습니다.

원래는 은화 2닢이었지만, 정치가 클레온이 3닢으로 인상했죠.

아리스토파네스의 연극 ‘아카르나이의 사람들’에서, 민주주의에 무관심해진 아테네 시민들은 프닉스를 비워둔채 아고라에서 빈둥거렸습니다. 이렇게 정체된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한 무리의 노예들이 도시를 돌아다니며 붉은 밧줄을 사용해 시민들을 프닉스로 몰아넣었죠. 도망치려는 모든 시민들에게는 물감자국이 남았고, 이들에게는 민주주의 참여를 거부한 죄로 벌금이 부과되었습니다.

과장된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도시에서는 민회가 열리는 날이면 상점을 닫아 시민들을 프닉스로 유도했습니다. 이는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에서는 시민들을 설득해 민회에 참여시키기 어려웠던 까닭이었습니다.

하지만 참석한 시민들에게 노동하지 못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지불하게 된 기원전 4세기부터 상황은 변했습니다. 프닉스는 8천 5백명의 시민들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확장 되었고, 이후 다시 1만 3천명이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확장되었습니다. 확실히 동기를 부여하는데는 붉은 밧줄보다는 돈이었겠죠.


유산으로서의 민주주의

아테네는 극장, 건축, 철학을 비롯하여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여러 혁신을 도입하였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가장 큰 업적은 시민들에 의해 통치되는 도시의 개념을 도입한 민주주의 정부였죠.

기원전 508년, 민주정을 도입하기로 한 결단은 우리가 아는 문명을 형성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1792년, 미국의 혁명 운동가 토마스 페인은 그의 저서 ‘인간의 권리’에서 ‘아테네에서는 작았던 것이 미국에서는 거대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아테네에 비해 훨씬 규모도 커지고 복잡해졌지만, 두 민주주의는 여러 측면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의 아들들의 독재정에 대한 반발로 탄생한 것처럼, 서구 사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또한 영국에 저항한 미국 식민지 혹은 구(舊)제도에 저항한 프랑스 혁명처럼 독재에 대한 반발에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가장 오래도록 남은 가치는 정치 권력이 시민에게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중심 개념은 로마의 통치 아래 놓인 그리스의 철학자와 역사학자에 의해 보존되어, 중세의 학자들에게 넘어갔으며, 오늘날 정치 체제의 기반을 마련한 현대의 정치 활동가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각주   [ + ]

1. 민회 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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