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소개

클레오파트라 7세 테아 필로파토르는 18세가 되던 기원전 51년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이전에도 권력을 장악 하려던 그녀의 시도는 실패를 거듭했으나, 마침내 이집트 유일의 통치자로 등극하게 된 것입니다.

플루타크의 주장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의 파라오 중 유일하게 이집트어에 능통했다고 합니다. 뛰어난 지적 능력과 더불어 상당한 교육을 받은 그녀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여 이집트를 독립 국가로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전략적 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당시 로마는 지중해의 제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두 땅의 수호자

클레오파트라가 가졌던 이집트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집트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고대 이집트 사회에 공명 하면서 강력한 영향을 끼친 관념적 대상으로 자리매김 하는 데에 일조 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신성한 어머니이자 마술과 신성한 생산의 상징인 이시스 여신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두 땅의 수호자로서 입지를 굳혔으며 파라오의 지위를 정당화했습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의 공동 통치, 그리고 추방

기원전 51년,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는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딸과 장남에게 왕국을 물려줍니다. 이들이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입니다.

이 둘은 당시의 관습에 따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새로 즉위한 파라오의 나이는 10세, 그의 누이이자 부인은 17세였습니다.

통치는 시작부터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기원전 50년에서 48년 사이에 있었던 가뭄과 홍수는 이집트의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아킬라스 장군과 왕실의 섭정이었던 포테이노스는 어린 통치자들의 정치적 결단에 끊임없이 훼방을 놓았고, 결국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공모하여 클레오파트라를 폐위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기원전 48년, 클레오파트라는 추방을 당합니다.


폼페이우스의 운명

클레오파트라가 추방당한 당시 로마는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며, 기원전 48년 전쟁에서 패한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쳐 잔류 병사들을 모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폼페이우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심복의 제안에 따라 폼페이우스를 암살하고, 그의 머리를 선물하여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히려 화를 불러옵니다. 카이사르는 공로를 인정하기는커녕, 로마인을 살해한데 대해 매우 분노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계략

폼페이우스를 죽인 프톨레마이오스를 향한 카이사르의 적개심을 알아차린 클레오파트라는 이 상황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녀는 당시 강력한 권력을 자랑하던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비밀리에 이집트로 향합니다.

이집트 영토 밖에서 그녀는 융단에 몸을 숨겨 카이사르의 숙소로 숨어 들어갑니다. 이렇게 성사된 운명적인 만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카이사르는 너무 어리고 남의 말에 쉽게 휘둘렸던 파라오보다 클레오파트라에게서 이집트 통치자가 지녀야 할 능력을 발견했던 것 같습니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유언을 근거로 들며 두 남매간의 평화를 중재하고자 합니다.


왕위 등극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격분 했으며, 그의 심복들도 클레오파트라의 귀국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아킬라스 장군과 포테이노스는 어린 파라오를 설득해 카이사르와 클레오파트라를 축출 하려 했으며, 이 계획은 기원전 47년의 알렉산드리아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기원전 47년 3월,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군대를 대파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뒤 도망치던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결국 나일강에서 익사하고 맙니다.

자신의 정적들이 죽거나 힘을 잃자, 클레오파트라는 그녀의 또 다른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결혼하여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전쟁이 끝난 후,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가 맺은 연인 관계와 정치적 동맹은 더욱 굳건해집니다.


로마로 간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47년 6월,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인 카이사리온을 낳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아들인 카이사리온 대신 조카인 옥타비아누스를 자신의 정통 후계자로 선택합니다.

그런데도 카이사르는 로마로 돌아가면서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동생이자 남편을 초대해 로마에 머물게 합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여전히 클레오파트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전략가였던 카이사르는 4개의 부대를 이집트에 주둔시키고, 그가 신임하는 이를 통해 이집트의 국정을 운영 하였고, 이를 통해 로마에 중요한 물자인 밀을 통제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수행원들은 카이사르가 살해된 기원전 44년 3월까지 로마에 남아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

카이사르가 가장 신뢰한 부하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그가 로마에 있는 동안 자주 클레오파트라를 찾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친아들이며 진정한 적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해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차지 하려던 이집트의 물자를 먼저 차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서 강력한 동맹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기원전 41년 겨울, 그녀는 배로 이집트를 둘러보는 호화로운 여행을 계획해 안토니우스에게 이집트의 부와 통치자로서 자신이 가진 권력을 보여줍니다.

이후, 이 둘은 연인 관계이자 정치적 동맹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 원로원은 이 사실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의 여론을 진정시키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인 옥타비아와 결혼합니다.


새로운 이집트 제국?

비록 옥타비아와 결혼식을 올리기는 했으나, 안토니우스는 여전히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으로 남아있었으며 둘 사이에는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의 영토를 늘려나갔고, 연인인 안토니우스와 함께 이집트는 물론 이집트 외 지역에서도 정치적 선전을 이어갑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목표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에 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연방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결국 로마인인 자신의 부인을 버리고 이집트 여왕인 클레오파트라를 선택했으며, 이 일로 로마 상류층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이렇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집중하는 동안, 옥타비아누스는 조심스레 군사력을 모으고 로마에서의 정치적 입지를 다졌습니다.


로마와의 전쟁

옥타비아누스는 자기 자신을 내세워 정치적 선전을 대대적으로 펼쳤으며,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아군인 로마인을 공격함으로써 받게 될 비난의 화살을 피하고자,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를 대상으로 전쟁을 선포합니다.

당시 로마는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강력한 이집트 함대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군대가 함께 저항했지만, 결국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대패하고 맙니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는 이집트에 상륙하며 자신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알립니다.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이 사건을 묘사한 수많은 기록과 전설로 인해, 이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파악이 어렵다고 합니다.

통설에 따르면,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는 소문을 들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스스로 자결을 시도했으며 서서히 숨을 거두던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인도 되었다고 합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잡히면 로마의 거리를 끌려다니며 패배의 처참함을 맛보게 될 것을 알았던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계획합니다.

그녀는 비소를 이용해 음독자살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작은 독사에게 물려 자살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더욱 극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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