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전투

전투 개관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트라이림 600척은 아테네에서 북쪽으로 35km 떨어진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것은 명망 높은 아테네의 장군 밀티아데스가 이끄는 1만 1천명의 중장보병들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병력은 그리스 병력의 5배에 달했지만, 페르시아의 정복 야욕을 막아낸 것은 이 소수의 병력이었습니다.

마라톤 전투는 페르시아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고 아테네의 승리는 오래도록 기념되었습니다.

현대에서 마라톤이라 부르는 장거리 달리기는 전투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아테네까지 뛰어간 병사를 기념하는 경기라고 하죠.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전설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말입니다.

페르시아군엔 활을 장비한 기마병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페르시아군은 매우 뛰어난 기동력을 발휘했고, 중동의 건조한 암석 지대에서 특히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의 기병대는 산악지형이나 삼림지역에선 효율이 떨어졌습니다.


분쟁의 원인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략하려 했던 이유 중 하나는 풍부한 은 광산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545년, 페르시아는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한층 더 목적에 가까워졌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소아시아 내의 일부 그리스 인구는 항복했고 페르시아는 대규모 침략을 실행할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기원전 494년, 밀레토스 시는 페르시아 지배자들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밀레토스는 인근 도시였던 에레트리아 시와 아테네의 지원을 받아, 중요한 페르시아 신전을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이 신성모독에 분노했고 기원전 491년, 그리스 도시들로 전령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전령을 죽였고 이는 다리우스의 침략으로 이어졌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의 공격은 낙소스 시를 점령하고 거주민들을 노예로 삼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에레트리아 시를 정복했죠.

계속되는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는 자신이 아후라 마즈다 신의 선택을 받은 ‘왕중의 왕’이며 ‘세상의 주인’이라고 천명했습니다.

그는 그 칭호에 걸맞은 군주가 되기위해 이집트, 바빌로니아, 소아시아의 리디아 지역은 물론, 여러 군소 국가를 정복했습니다.

다리우스는 속국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지만, 매년 공물을 바칠 것,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죠.


그리스의 반응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의 맹렬한 공격에 놀랐습니다.

다가오는 침략을 막으려면 도움이 필요하다고 여긴 아테네에서는 다른 도시들에게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놀랍게도, 아테네에서는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스파르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스파르타는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아폴로 카르네이오스에게 바치는 종교적 축제 때문에 제 시간에 지원 병력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이 축제 기간동안은 다음 만월까지 도시를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죠.

아테네가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지원군이라곤, 보이오티아인들의 도시인 플라타이아에서 보내온 1천명의 중장보병 뿐이었습니다.

그리스 문명 전체가 외부 침략자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사태는 역사상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같은 언어와 종교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서로 전쟁을 벌이곤 했죠.

이번 페르시아의 침공은 그리스의 생존을 위해 뭉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첫번째 순간이었습니다.

플라타이아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중 하나인 플라타이아 전투가 벌어진 장소입니다. 이 전투는 그리스의 결정적인 승리로 종결 되었고, 그리스는 성공적으로 페르시아 침략자들을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군의 도착

페르시아 함대는 본디 팔레론 항구에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추방 당해 페르시아 세력에 가담한 아테네의 전임 독재자 히피아스는 마라톤에 상륙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곳이라면 기병을 배치하기가 훨씬 수월할 거라고 말이죠.

페르시아의 계획을 몰랐던 아테네인들은 마라톤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해둔 상태였습니다.

덕분에 아테네인들이 허겁지겁 방어를 준비하는동안, 페르시아군은 몰래 해변에 주둔지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팔레론은 한동안 아테네의 주요 항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상황은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테미스토클레스가 피레우스의 천연 항구를 개발할 것을 주장하며 바뀌었습니다. 피레우스는 점차 활기 넘치는 항구가 되었고 팔레론은 점차 버려졌습니다.


아테네의 전략

페르시아군이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아테네인들은 창의적인 방어 전략을 세워야 했습니다.

아테네 시에서는 플라타이아에서 보내온 1천명의 지원군에 추가로 1만명의 중장보병을 편성하여 페르시아군의 주둔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파견했습니다.

포진을 마친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을 기다릴지, 선제 공격을 가할지 결정을 내려야 했죠.

아테네의 지휘부는 전자가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밀티아데스 장군은 선제공격이 더 유리할 거라고 여겼습니다.

페르시아군이 바다를 등지고 있었던 까닭이었죠.

결국 밀티아데스의 의견이 채용 되었고 그리스군은 행동에 돌입했습니다.

마라톤 전투 이전까지만 해도 밀티아데스 장군은 독재를 꾀한다는 의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밀티아데스는 영웅이 되어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밀티아데스는 새로 얻은 유명세를 이용해 대규모 함대를 요청했습니다. 그 이유는 숨겼지만, 결국 아테네의 군사 자원을 사용해 파로스 시와 사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밀티아데스의 파로스 포위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장군 본인 또한 이후 괴저로 악화하게 될 부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아테네에 돌아온 밀티아데스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재판을 받았고 사형은 면했지만, 엄청난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밀티아데스는 재판 이후 얼마 지나지않아 사망했습니다.


전투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 병력은 궁수나 기병대 없이 페르시아군을 향해 돌격 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군은 이런 정신나간 전술에 미처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그리스군을 막아낼 수 있었지만, 결국 함선까지 밀려나 후퇴해야했죠.

이 전투에서 페르시아는 대략 6천 4백명의 사상자라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반면 아테네의 사상자는 고작 192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테네의 요청에 따라 스파르타군이 마라톤에 도착했지만, 전투는 이미 끝난 뒤였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스파르타인들은 전장을 둘러본 뒤, 아테네의 승리를 축하한 다음 떠났다고 합니다.


영웅적 위업

마라톤에서의 승리는 기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이 기적을 전설적인 영웅들이 도시를 지키기 위해 되살아나 함께 싸웠다는 목격담과 결부시켰습니다.

가령 몇몇 아테네인들은 신화 속의 테세우스 왕이 무기를 들고 마라톤에 나타난 모습을 봤노라고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아테네의 아고라에 새겨졌죠.

마찬가지로 몇몇 중장보병들은 사자 가죽을 걸치고, 곤봉을 든 헤라클레스가 마라톤에 나타났다고 증언했습니다.

소위 이 영웅들의 ‘현현’ 덕분에 마라톤 전투는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지위를 얻게 되었습니다.

헤라클레스는 영웅적인 위업과 업적으로 유명했지만, 그의 죽음은 놀랍게도 비극적이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세번째 부인 데이아네이라는 남편의 불륜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사랑의 불씨를 다시 지피고 싶었던 데이아네이라는 헤라클레스가 죽인 켄타우로스 네소스의 피를 묻힌 옷을 헤라클레스에게 줬습니다. 불행히도 그 피엔 독이 들어있었고 옷을 입은 헤라클레스의 피부는 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을 견딜 수 없었던 헤라클레스는 오이테 산에 장작더미를 쌓고 필로크테테스에게 불을 붙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인간이었던 헤라클레스의 육신은 불탔지만, 제우스는 그의 불멸성을 올림포스로 불러들였습니다.


여파

마라톤에서 패배한 페르시아는 팔레론 만을 통해 아테네를 침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택에 아테네인들은 도시로 돌아가 제대로 된 방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추가적인 피해를 우려한 페르시아 함대의 제독은 공격을 취소하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다리우스는 원정이 실패하자 격분했고 육상과 해상을 통해 동시에 진군하여 복수할 방법을 찾기로 결정했습니다.

한편, 스파르타는 마지못해 아테네의 승리를 축하할 수 밖에 없었죠.

아테네인들은 마라톤에서 죽은 병사들을 기념 고분에 매장했습니다. 고분에 있는 10개의 비석엔 각 부족의 명예로운 전사자들의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두번째 고분은 아테네인과 함께 사망한 노예와 플라타이아인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죽은 병사들에게는 영웅으로 숭앙받을 권리가 부여되었고 심지어 교단을 가질 영예까지 주어졌습니다. 밀티아데스 장군 또한 죽은 뒤 부하들 곁에 묻혔습니다.


결과

마라톤 전투의 승리는 아테네가 맞이한 새 시대의 서막이었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를 성공적으로 몰아낸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경쟁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테네인들은 이 영광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아테네 시와 델포이에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또한 마라톤 전투는 압제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과도한 권위주의에서 비롯된 단순한 결함 정도로 치부되었던 압제는 이제 고국에 대한 반역으로, 지도자들이 전력을 다해 피해야만 할 죄악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은 향후 2세기동안 민주주의 제도를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마라톤 전투 이후, 아테네인들은 아폴론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델포이에 보물 창고를 지었습니다. 작은 사원 모양의 기념물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으로부터 탈취한 전리품으로 지었습니다.

보물 창고의 메토스1)소간벽에는 페르시아와 싸우는 아테네인들을 도왔다는 신화적인 두 영웅,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의 업적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테나와 아마존의 모습도 소간벽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각주   [ + ]

1. 소간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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