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아고라

아테네의 아고라

아고라는 아테네 시 행성의 중심이었지만, 정치가와 시의 공직자들만 찾던 장소는 아니었습니다.

이 구역에는 사람들이 상인으로부터 식량과 물품을 구매할 수 있는 시장이 있었습니다.

또한 공공장소에서 학파를 형성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철학자들도 자주 찾아왔죠.

종교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헤파이스토스와 아폴로에게 헌정된 신전들이 12주신의 제단과 시조 영웅들의 기념물과 함께 아고라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파나테나이아 길은 아테네 아고라의 중심가였습니다. 이 길은 디필론 문으로부터 아크로폴리스까지 이어졌지요.

길의 이름은 도시의 수호신인 아테나를 기리기 위해 4년마다 열렸던 파나테이아 축제에서 유래했습니다. 본디 이 축제에는 종교적 의미만 포함되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운동 경기와 문화적 경연도 포함하게 되었죠.

파나테나이아 길은 축제의 절정기에 아크로폴리스의 아테나 신전까지 이어지는 행렬이 벌어지는 곳이었죠. 그러나 이 길에서는 전차 경주와 도보 경주를 포함하여 축제의 일부였던 운동 경기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채색 회랑

채색 회랑이라는 의미의 ‘스토아 포이킬레’라는 이름은 벽에 그려진 그림으로부터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 그림은 폴리그노토스처럼 유명한 화가들이 기원전 5세기 경에 그린 것으로, 마라톤 전투처럼 그리스가 거뒀던 위대한 군사적 승리를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회랑은 시민들이 공적 만남을 갖는 장이었지만 그곳을 가르침의 장으로 삼았던 철학자들이 특히나 유명했습니다.

기원전 301년, 철학자인 키티온의 제노는 스토아 포이킬레에서 철학학파를 설립했고, ‘스토아 학파’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의 회화는 적어도 미노스 문명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크노소스에 위치한 미노스 궁전에 있는 몇몇 작품을 포함해 당대의 놀라운 작품들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초창기의 벽화는 대개 신전이나 공공건물에서 발견 됐지만, 기원전 5세기부터 개인 소유의 건물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공예가로 여겨졌지만, 몇몇은 굉장히 유명해지기도 했습니다. 폴리그노토스는 처음으로 유명세를 얻은 화가였습니다. 그는 트로이의 약탈과 같은 대작을 스토아 포이킬레에 그렸고 델포이의 크니도스 공회당에서도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폴리그노토스, 그리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미콘과 파나이오스는 그리스 회화의 전성기로 여겨지는 시대를 열었습니다.


거래

아고라의 거래는 법관들의 감독을 받았습니다.

5명의 아그라노모이가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품질을 관리했으며, 시장에서 세금을 징수했죠.

이렇게 얻은 시의 수입은 법관과 치안관의 급료를 지불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장은 상호이익의 장이었습니다. 고객은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고, 상인은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으며, 도시의 공무원들은 민주주의의 바퀴를 돌리는데 필요한 자금을 얻을 수 있었죠.

아고라에선 다양한 물건을 판매했습니다. 많은 상인들이 판매하는 물건의 종류에 따라 서클 혹은 길드 단위로 묶였죠. 아테네 인구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노예 역시 아고라에서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래가 아고라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 장인과 조각가는 아레오파고스 경사면에 살았으며, 도공과 제조업자는 인근의 케라메이코스 구역에서 일했고, 금속 세공사는 헤파이스테이온 근처에 머물렀습니다.

물건을 판매하는 이는 전문적인 상인1)카펠로이일 수도, 직접 자신의 물건을 판매하는 장인일 수도, 심지어는 잉여생산물을 파는 농민일 수도 있었죠.


아폴로 파트루스

아폴로 파트루스의 신전은 본디 기원전 535년 페이시스트라토스에 의해 지어진 신전이었으나, 수십년 후 페르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습니다.

제단만 남은 신전은 오래도록 재건되지 못했고, 페르시아의 신성모독을 상기시켜주는 상징으로 남아있었죠.

결국은 기원전 4세기 경 새 신전이 건축되었습니다.

내부의 조각상은 제우스 회랑에 그림을 그렸던 예술가 에우프라노르가 제작했습니다.

도시 사람들의 기원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신전은 아테네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었습니다.

‘파트루스’라는 이름은 아버지라는 의미로, 모든 아테네인들의 조상인 이오니아 그리스인의 시조, 이온의 아버지가 아폴로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이오니아는 도리스, 애올리스, 아카이아와 함께 그리스의 4대 주요 부족 중 하나였습니다.

이오니아인들은 에게 해의 동쪽 해안 지역인 이오니아로부터 퍼져나갔습니다. 이들은 또 여러 식민지를 세웠는데, 대부분이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 지역에 위치했죠.

아테네인들은 모든 이오니아인들의 고국은 아티카이며, 시조 영웅 이온이 어머니의 방식을 따랐던 아테네인이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이온의 어머니는 아테네의 신화적인 왕 에렉테우스의 딸인 크레우사였다고 합니다.


헤파이스테이온

헤파이스토스 신전은 콜로노스 아고라이오스 언덕 위에서 아고라를 굽어봅니다.

헤파이스토스 신전은 오늘날까지도 가장 잘 보존된 그리스 신전 중 하나입니다. 중세에 이곳을 교회로 개조했던 까닭이죠.

다만 신전의 원형은 보존될 수 있었지만, 주변의 조각상은 손상되고 말았죠.

신전은 야금술의 신, 헤파이스토스뿐만 아니라 예술과 공예의 여신, 아테나 에르가네에게 헌정된 곳이기도 했습니다.

헤파이스테이온의 거의 대부분은 테세우스의 과업처럼 유명한 신화적 사건들에 대한 묘사로 화려하게 장식되었습니다.

테세우스의 모습을 그린 장면들로 인해, 이 신전은 ‘테세이온’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 이름은 오늘날 아테네의 도시 구획의 이름으로 명맥을 잇고 있습니다.

헤파이스테이온이 야금술의 신 헤파이스토스, 그리고 길쌈과 공예의 여신 아테나 에르가네에게 바쳐진 신전임을 감안하면, 무기와 갑옷을 생산했다는 증거가 발견되는 수많은 금속 세공점들이 신전과 같은 언덕에 세워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비슷한 예로, 케라메이코스라고 알려진 도공 구역도 헤파이스테이온 뒤에 있었는데, 이는 아테나가 도공의 수호신이기도 했던 까닭이었습니다.


불레우테리온

불레우테리온은 민주정 절차에 기여했던 또 다른 건물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불레’라는 아테네 시민들의 평의회가 열렸습니다.

이 500인 평의회는 각 그리스 부족의 50인 대표단들로 구성되었으며, 모두 1년의 임기를 거쳤습니다. 대표들은 투표를 통해 30세가 넘은 시민 중에서 선출되었습니다.

평의회의 집행 위원회, 프리타네이스는 매달마다 선출되었던 50인의 대표단 중 한 집단이 담당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이 한달동안, 프리타네이스는 불레우테리온에서 매일 만나 회합을 가지며 법안을 논의하곤 했죠.

아테네의 민주주의 체제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교체를 보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각 부족은 한달동안 프리타니를 담당했고, 법관들은 1년 주기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에 해가 된다고 판단된 시민을 추방하는 절차도 있었죠. 이러한 절차는 도편 추방제로 알려졌으며, 본래는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매년 6번째 프리타니가 담당하는 시기면, 민회에서는 아테네인들에게 도편 추방을 바라는지 의견을 물었습니다. 투표가 통과된 경우에는 8번째 프리타니 시기에 도편 추방이 진행되었습니다.

도편 추방 투표는 아고라에 친 울타리 안에서 진행되었고 집정관과 불레의 감독을 받았습니다. 시민들은 오스트라카라 불리는 도자기 조각에 추방을 원하는 인물의 이름을 적고 항아리에 넣는 것으로 표를 던졌습니다. 도편 추방은 최소 6천표 이상이 있어야 가능했으며, 가장 많이 이름이 거론된 자는 추방 당했습니다.

추방 당한 자에게는 도시를 떠나기까지 10일의 유예기간이 주어졌고 10년동안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추방자의 시민권과 재산을 몰수하지는 않았고, 기원전 461년 키몬의 경우처럼 비상시에는 민회에서 추방자를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추방 당한 유명 정치인으로는 크산티포스, 테미스토클레스, 알키비아데스 등이 있으며, 투키디데스는 추방 기간 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했습니다.


프리타네이온

프리타네이스의 본부였던 프리타네이온은 아고라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였습니다.

프리타네이스는 도시의 일상 업무를 담당하는 원로회의 집행 위원회였습니다.

프리타네이스는 프리타네이온에서 식사를 했으며 그중 17인은 비상 상황에 언제든 대처할 수 있도록 그곳에서 숙직했습니다.

프리타네이온에는 도시의 기준 도량형을 정하는 곳이기도 했죠.

모든 공적인 희생의식에 사용되었던 헤스티아의 성화 또한 이곳에 있었습니다.

프리타네이스는 500인으로 구성된 불레 평의회의 법관이었습니다. 이 회합의 좌석은 10개의 부족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어 한 부족당 50인이 참석했습니다.

프리타네이온은 프리타네이스의 감독 아래 놓였습니다. 프리타네이스는 ‘프리타니’라는 직책을 1달간 담당했고, 그 기한 뒤에는 새로운 부족이 프리타네이스로 선택되었습니다.

프리타네이스에서는 매일 투표를 통해 구성원 중 하나를 에피스타테스, 평의회의 의장으로 뽑았습니다. 이 자리에 한번 이상 오를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406년, 아르기누사이 전투로 많은 함선과 병사를 잃은 사실에 분노한 아네테인들은 전투와 관련된 장군들에게 무조건적인 처벌을 내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에피스타테스였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법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는 절대로 할 수 없다며 표결을 거부했습니다.


헬리아이아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법정이었던 헬리아이아는 ‘헬리아스트’라는 판사 여럿이 주재하는 곳이었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공판이 벌어졌던 아테네의 시민들에게 재판은 일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헬리아스트는 2가지 기준에 따라 무작위로 선택되었습니다.

  1. 공식적으로 헬리아스트 자격 명단에 오른 6천명 중 하나여야 할 것.
  2. 재판 당일 법정에 참석할 수 있어야할 것.

헬리아스트의 의무 때문에 일터에 나서지 못한 점에 대해 보상하는 동시에 사법 절차에 대한 참여를 고무시키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헬리아스트에게 은화 2닢의 봉급을 지불할 것을 제도화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동안, 아테네 행정부에서는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참여를 장려하기 위해 중요한 혁신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페리클레스의 주도 아래, ‘미스토스’라는 특별한 수당이 만들어졌습니다. 본래 미스토스는 불레의 참여자와 헬리아스트2)판사에게만 지급되었지만, 기원전 4세기에는 아테네 민회에 참여한 이들을 위한 미스토스 에클레시아스티코스를 창설했습니다.

미스토스는 가장 가난한 시민에게도 공적인 역할을 수행할 길을 열어준 수당이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리스의 다른 곳에도 민주주의 정권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스토스 체계가 있었던 곳은 오직 아테네뿐이었습니다.


시장

아고라에서 아테네인들은 다양한 물건을 사고 팔 수 있었습니다.

상설 도매 시장은 상품의 종류에 따라 몇개의 구획으로 나뉘었습니다.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과 장인은 시민일 수도, 외국인일 수도, 심지어 해방된 노예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음식과 의복으로부터 보석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판매했죠.

이 어마어마한 다양성은 치열한 경쟁을 낳았고, 이 경쟁을 통해 시장 가격은 조율될 수 있었습니다.

도량형은 도시마다 달랐습니다. 그랬기에 아고라에서 진행되는 거래는 불레우테리온에서 보관하던 아테네의 공식적인 도량형에 따라야 했습니다. 그 결과 상인들은 불레우테리온을 방문해 도시의 공식적인 기준에 맞춰 자신의 측정 기구를 시험해야 했습니다.

무게 체계는 동전의 표준 무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기본 단위는 오볼3)0.72g이었지만, 드라크마4)4.3g, 미나5)430g, 달란트6)25.86kg를 비롯한 다른 단위들도 있었죠.

곡물 거래 단위를 계산할때 사용했던 메딤노스7)c. 52l와 포도주를 계량할때 사용했던 메트레테스8)c. 40l처럼 액체의 부피를 재는 단위도 있었습니다.

메트로노모이로 알려진 특별한 법관은 아고라의 도량형이 제대로 사용되고 있는지 감시하기 위해 임명되었죠.


법원

헬리아이아가 아테네에 있었던 유일한 법정은 아니었습니다. 이 다른 법정도 남쪽 회랑 옆에 있었죠.

역사학자들은 그 근방에서 발견된 상자와 안에 들어있던 7개의 청동 투표지를 근거로 법정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청동 투표지는 배심원 판결을 위해 사용된 것이었습니다.

아테네에서 재판이 흔히 벌어졌던 이유는 아마 부당함에 대해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를 중시했던 민주정의 특징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불법 행위를 이런 식으로 처결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소한 혐의에 대해서는 법관이 개인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었죠.

공개 재판은 살인, 강도, 정치 범죄처럼 보다 심각한 위법 행위를 처결하기 위해 올렸습니다.

아테네에서 가장 유명한 재판은 아마도 기원전 399년에 있었던 소크라테스의 재판일 것입니다. 이 철학자는 아테네의 만신전에 대한 불경을 저질렀고, 도시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고발 당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재판 당시의 상황은 그의 두 제자, 플라톤과 크세노폰이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크리티아스, 카르미데스, 알키비아데스를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여러 친구들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로 인하 이미 위기에 빠지고만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반대했던 점을 감안하면, 소크라테스에 대한 고발은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부인했지만, 그는 아테네의 전통적인 가치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희생양이 되어버린 궤변가들과 종종 교류하기도 했죠.

고발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소크라테스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그가 지은 죄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정해진 형벌이 없었으므로, 고발자들과 피고측에서 적절한 형량을 제시해야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프리타네이온에서 자신을 부양할 것을 제안했고 고발자들은 사형을 요구했습니다. 언제나 법을 따르겠다고 선서했던 소크라테스는 이 사형 선고를 받아들였고, 독미나리를 마시는 방식으로 처형 당했습니다.


화폐 주조

조폐국은 도시에서 주화를 만들던 곳입니다.

오늘날의 발굴을 통해 주화 제작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원반형의 금속 조각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아테네의 조폐국은 시의 아고라에 위치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주화 주조를 위해 필요했던 은의 대부분은 라브리오 은광에서 공급했습니다.

라브리오 광산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이 은광을 상실하게 되자 통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아테나의 황금 조각상을 녹여 금화를 주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모든 도시 국가는 저마다의 주화를 주조했습니다. 이는 한 도시의 주화가 그 도시의 영역 안에서만 법적 가치를 지닌다는 뜻이었죠. 그랬기에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가게 된 사람은 외지에서 가져온 주화를 현지의 주화로 환전해야 했습니다.

환전의 필요성은 아고라나 피레우스 같은 항구에서 환전상이 성행했던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오늘날과 비슷하지만 환전상들은 환전을 통해 수익을 얻었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주화의 발명으로 인해 주화의 위조 또한 이뤄지게 되었죠. 도시 내에서 위주 주화가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자 아테네 시에서는 아르구로스코포스9)은 검사관라는 특별한 법관을 임명해 아고라의 주화를 조사하게 했습니다. 적발된 위조범은 사형 판결을 받았죠.

각주   [ + ]

1. 카펠로이
2. 판사
3. 0.72g
4. 4.3g
5. 430g
6. 25.86kg
7. c. 52l
8. c. 40l
9. 은 검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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