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의 기원

아크로폴리스는 오랜 역사를 거치며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바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석기 시대 즈음, 사람들이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미케네 시기에는 요새가 건설되었죠.

석조 건물들의 등장은 기원전 7세기경의 일이었지만, 오늘날의 유적에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유명한 건축물들은 대개 기원전 5세기경에 조성되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의 위치는 아테네의 건국 신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의 터는 도시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아테나와 포세이돈이 경합을 벌인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이를 통해 아크로폴리스에는 신성성이 부여되었고, 또한 도시의 종교적 중심지로 여겨졌습니다.

아테나 폴리아스의 신전을 비롯하여 구 아크로폴리스의 옛 건물들이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의 페르시아군에게 불타버린 뒤,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페리클레스는 거대한 천연 암석으로 아테네의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위대함에 바치는 거대한 기념물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야심만만한 건설 계획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전체 공사에는 수백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고, 결과물을 두고 유네스코에서는 ‘자연경관을 건축에 수용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평했죠. 파르테논 하나에만 469 달란트, 거의 30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비용이 사용되었고 이는 대략 은 12톤에 해당하는 양입니다.

막대한 비용을 납득시키기 위해,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위대함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사가 수많은 석수, 목수, 금속공, 화공과 비숙련 노동자를 비롯하여 돈을 벌 기회에 기꺼이 뛰어들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게 될 거라는 사실에도 주목하라고 했죠.


아테나 니케의 신전

아테나 니케의 신전은 미케네 시기의 옛 요새 잔해 위에 지어졌습니다.

이 신전에서 숭배가 이뤄졌던 건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건물은 한 세기 뒤에 벌어졌던 페르시아 전쟁 중에 파괴되었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에는 재건 되었죠.

아테나 니케라는 이름은 ‘승리의 아테나’라는 의미인데, 아테네의 승전을 희망하며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

신화와 관련된 예술이 조각 되었던 다른 그리스 건축물들과는 달리, 이 신전에는 페르시아인들과 전쟁을 벌였던 역사적인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신전의 여신관은 아테네인들 중 무작위로 선택 되었으며, 정기적으로 50 드라크마의 봉급을 받았고, 제물로 희생된 동물들의 가죽과 신체 일부가 부수입으로 주어졌습니다.

아테나 니케의 신전이 세워진 장소는 피레우스와 팔레온 항구를 포함하여 아티카 남쪽 해안의 아름다운 전경을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 주목할만한 특징 때문에 인근의 미케네 유적과 함께 여기서 옛 아테네 왕조의 9번째 왕, 아이게우스가 아들의 귀환을 바라며 바다를 내다봤을 거라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습니다.

아테네에서 가장 중요한 신화적 영웅이었던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에게 희생될 젊은이들 중 하나로 위장한 채 크레타로 떠났습니다.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이고 아테네의 젊은이들과 함께 승리와 기쁨을 상징하는 흰 돛을 달고 돌아오겠다고 아이게우스에게 약속했습니다.

영웅 테세우스는 괴물을 죽이고 고국으로 향했지만, 애도를 뜻하는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검은 돛을 본 아이게우스는 테세우스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비탄에 빠진 왕은 아크로폴리스의 가파른 요새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습니다.

다른 신화에서는 아이게우스가 바다에 몸을 던졌고, 그 바다는 그의 이름을 따서 ‘에게 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페리클레스의 아크로폴리스

페르시아 전쟁으로 적잖이 파괴된 까닭에, 아크로폴리스의 건설에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습니다.

하지만 아크로폴리스가 가장 중요한 발전을 이룩했던 것은 기원던 5세기의 일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아테네가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죠.

무역과 라브리오 은광을 통한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아테네의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도심 재건이라는 거대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조각가 피디아스는 물론, 건축가 이크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 같은 저명한 예술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힘을 합쳐 파르테논과 프로필라이아 문 같은 건물들을 지어올렸죠.

페리클레스의 목표는 아크로폴리스를 신들과 아테네의 인간들을 위한 영광스러운 기념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의 역사는 페리클레스의 건축 계획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대에 있었던 화재와 침략으로 아크로폴리스의 일부가 위험에 처하거나 파괴된 경우는 많았고, 아테네인들과 아크로폴리스를 흠모했던 외국인들은 페리클레스의 업적이 남긴 유산을 복원하고, 장식하고, 또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예를들어, 프로필라이아 전면의 의전용 입구는 기원후 280년, 게르만족의 습격에 파괴된 지 얼마 안된 근처의 기념물 석재를 사용하여 플라비우스 셉티미우스 마르켈리누스가 지은 것이었습니다. 이 입구는 현대에 처음 발굴했던 사람의 이름을 따서 뷜레 문이라 불리게 되었죠.

오랜 역사를 거치며, 아크로폴리스는 많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서는 교회로 개조된 파르테논을 방문하려는 순례자들을 수용했습니다. 제4차 십자군 이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라틴 제국의 아테네 공작 거처가 들어섰죠. 오스만 시기에는 모스크와 거주구역, 지방 관리의 하렘을 지키는 요새 역할을 했습니다.

독립 후 새로 들어선 그리스 정부가 고전기의 아크로폴리스 유적을 재건하려 했던 것은 19세기 초반의 일이었습니다. 중세와 현대의 건물들은 철거 되었고, 재건 공사는 그 후로도 계속 진행중입니다.


아테나 프로마코스

프로필라이아 너머에는 아테나 프로마코스, ‘선봉의 아테나’를 묘사한 거대한 청동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조각상은 창과 방패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조각상은 기원전 5세기 경 예술가 피디아스가 세운 것이었습니다.

명문에 따르면, 조각상의 제작에는 9년이 걸렸으며, 50만 드라크마에 달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략 10m 높이에 달하는 조각상이 너무나 거대했던 나머지, 파우사니아스는 아테네에서 60km는 떨어진 수니온 곶에서도 조각상의 투구와 창 끝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주장했죠.

조각상의 방패 장식은 금속공이었던 미스의 솜씨로 각인되었습니다.

제우스의 머리에서 기적적으로 탄생한 아테나는 그리스의 만신전에서 가장 중요한 신 중 하나 입니다. 청동기 시대의 아테나는 양모 가공처럼 수익성 있는 가사 활동을 보호하는 에게 해의 여신이었습니다.

그 후 아테나는 여러 고대 그리스 도시들의 수호신이 되었고,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도시가 바로 아테네였죠. 하지만, 아테나는 여전히 장인, 방적공, 길쌈꾼, 대장장이 등의 보호자 역할도 유지했습니다.

여신은 아테나 폴리아스1)도시의 수호자, 아테나 에르가네2)공예의 수호자, 아테나 프로마코스3)‘선봉에서 싸우는 자’라는 뜻으로 전쟁의 여신으로 숭배 되었음을 암시등 특정한 측면을 반영한 수많은 이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테나는 또한 지혜의 여신으로 여겨졌고 그녀의 가장 유명한 상징은 아테네의 주화와 항아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올빼미였습니다.


아레포로이의 집

아레포로이는 특별한 의식을 담당하는 7세에서 11세 사이의 어린 소녀들이었습니다.

민회를 통해 4명의 소녀가 선발 되었고, 고위 법관인 상급 집정관이 둘을 골라 그 해의 아레포로이로 선택했습니다.

소녀들은 아크로폴리스의 집에 거주했습니다. 그들의 의무는 성물을 나르고, 아테나를 위한 페플로스를 짜는 일이었죠.

이 페플로스는 아테나를 기리는 축제인 파나테나이아때 여신에게 바쳤던 신성한 예복이었습니다.

아레포로이는 기본적으로 고귀한 출신만이 선택 되었으며, 오직 상류층의 여자아이만이 아레포리아와 파나테나이아 축제 기간동안 아테나를 섬길 특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파우사니아스는 ‘신비4)신성한 제물의 전달자’라는 두 여자아이가 아레포리아 기간동안 특별한 의식을 수행 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 소녀들의 주된 책무는 아테나의 여신관이 준 비밀스러운 물건을 머리에 인 채, 아크로폴리스에서 아프로디테 지구까지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아이들은 물건을 넘기고 보답으로 다른 무언가를 받았습니다. 아레포로이도 여신관도 물건의 정체를 알지 못했는데, 언제나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아레포로이의 다른 책무는 신전의 여신관을 도와 아테나의 페플로스5)의복를 짜는 성스러운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의복을 아테나에게 건네는 파나테나이아까지 9개월이 넘게 소요되었던 작업이었습니다.

어리고 경험 없는 아레포로이를 고용하여 신성한 의복의 순수성을 보장했습니다. 또한, 이 의식은 그리스 여성에게 가장 중요했던 방적과 길쌈을 배울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에렉테이온

에렉테이온은 특이한 신전이었습니다.

이곳은 아테나 폴리아스 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신화적인 건국자 케크롭스와 그의 아들 에렉테오스, 심지어는 도시를 두고 아테나와 경쟁 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도 헌정된 신전이었습니다.

신전은 여러 구획으로 나뉘었습니다.

동쪽 구역에는 아테나에게 헌정된 조각상이 보관되어 있었고, 서쪽 구역에는 포세이돈과 에렉테오스에게 봉헌 되었죠. 반면 케크롭스 왕의 무덤은 카리아티드 현관 아래에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신전 아래 지하에는 아테나의 신성한 뱀들이 기거한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아테나의 여신관들이 꿀빵을 먹였다고 전해지는 만큼, 뱀들의 이빨에서는 단맛이 났을지도 모르겠네요.

에렉테이온의 북쪽 건물은 아테네인들이 플린테리아와 칼린테리아 축제에 관련된 2가지의 특정한 종교의식을 치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격리 지역이었습니다.

플린테리아 시기면 2명의 처녀가 아테나 폴리아스의 올리브 나무 조각상을 신전 밖으로 옮겨 의복을 벗긴 다음 씻기고 닦았으며, 의복도 빨았습니다. 그리고 칼린테리아 시기면 조각상에 다시 옷을 입히고 장식한 다음 신성한 장소에 돌려놓았죠.

장례와 관련된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있는 이 두 축제는 언제나 이어진 형태로 고대 작가들의 기록에 나타납니다. 아테네인들은 여신이 ‘다른 의미로 바쁜’ 이 날에는 운수가 나쁘다고 믿었고, 조각상이 신전에 돌아갈 때까지는 중요한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파르테논 외부

파르테논은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유명한 건축물 중 하나로, 굳건한 고대 그리스 문명의 상징으로 남아있죠.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이 건물은 전통적인 신전이 아니었습니다.

조각가 피디아스와 건축가인 칼리크라테스와 이크티노스가 지은 이 건축물은 아테네 시의 영광을 기리는 위대한 기념물이었습니다.

그 영광은 수많은 조각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건축물 중에서도 가장 많은 조각이 가미된 기념물인 파르테논의 장식에는 몇몇 신화적인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아테나의 탄생과 아테네의 수호신 자리를 두고 포세이돈과 경쟁을 벌였던 장면, 거인들과 신들의 전쟁과 대 파나테이아의 전개 같은 내용들 말입니다.

기원전 447년에서 432년 사이에 건축되어 장식되었던 파르테논은 기원후 3세기에 게르만족 침략자들에 의해 파손되기는 했지만 거의 1000년 가까이 아테나 숭배가 이뤄졌던 곳입니다.

기원후 590년경, 파르테논은 마리아 파르테노스, 아테네의 새로운 수호자인 동정녀 마리아를 모시는 그리스 기독교 교회로 전환되었습니다. 이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에페수스, 테살로니카에 이어, 비잔틴 제국에서 4번째로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기원후 1204년, 제4차 십자군의 라틴계 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후 아테네는 이후 2세기 반 동안 십자군의 공작령이 되었고 이 정교회 교회는 성모를 모시는 가톨릭 대성당으로 바뀌었습니다.

기원후 1458년의 오스만 정복으로 인해 파르테논은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또 한번 전환되게 됩니다.

지속적인 정비와 보수가 이뤄지기는 했지만 파르테논 내에서 계속되었던 기독교 및 이슬람교의 활동은 다른 고대의 건축물에 비해 파르테논이 잘 보존되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안타깝게도 기원후 1687년, 베네치아가 아크로폴리스의 오스만 요새에 대한 공성을 벌이던 도중, 대포알이 화약을 보관하고 있던 파르테논에 직격 했습니다. 지붕은 폭발해버렸고, 3개의 벽면은 심각하게 파손 되었으며, 박공과 상단 벽 장식의 조각 대부분은 물론 일부 기둥과 메토스6)소간벽도 무너졌습니다.


파르테논 내부

파르테논의 내실, 신상 안치소에는 조각가 피디아스의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는 평을 받았던 거대한 아테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조각상은 크리셀레판티네, 금과 상아로 만든 것이었죠.

건설에 소모되는 엄청난 비용을 납득시키기위해,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이 조각상은 경제적 위기가 도래했을때 해체하여 사용할 비축용 금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신상 안치소에는 방의 습도를 조절해 조각상을 구성하고 있는 상아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웅덩이를 만들어뒀다고 전해집니다.

몇몇 연구자들은 파르테논의 아테나 조각상을 제작하는데 건물 자체만큼이나 큰 비용이 소모 되었을 거라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아쉽게도 조각상은 불에 의해 소실 되었거나 혹은 로마 후기에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는 소식 이후로는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플루타르코스나 파우사니아스 같은 역사학자들의 기록과 축소판인 바르바케이오의 대리석 조각상을 통해 조각상을 상세히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여신은 스핑크스와 2마리의 그리핀 형상을 한 삼중 볏으로 장식된 투구를 쓰고 왼손에는 거대한 원형 방패와 창을 들어 무장했습니다. 오른손에는 2m 높이의 날개 달린 니케를 들고 있었고, 여신의 왼발과 방패 사이에는 신성한 대형 뱀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아테나는 허리띠로 고정한 전형적인 페플로스 예복을 입었고, 가슴에는 메두사의 머리가 내걸린 뱀 모양의 아이기스를 착용했습니다.

오늘날 조각상의 복제본은 테네시, 내슈빌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 모형에 있습니다.


파르테논의 보물 창고

파르테논에 있었던 아테네의 국고는 아테나의 수호를 받고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국고에는 여러 정복을 통해 얻은 보물뿐만 아니라 대량으로 주조한 은화와 아테나에게 헌정된 여러 공물도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기원전 454년,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국고를 모두 파르테논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나머지 그리스에 대해 아테네가 행사하던 영향력을 분명히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부는 도시 소유의 데모시아와 여신에게 봉헌되어 종교적 용도로만 사용되었던 히에라 크레마타로 나뉘었습니다.

전성기를 누리던 아테네의 주요 수입원 둘은 라브리오7)라우리온의 은광과 델로스 동맹의 동맹 도시들이 바치는 공물이었습니다.

델로스 동맹은 기원전 478년, 150개의 그리스 도시들이 아테네를 맹주로 삼아 결성한 동맹이었습니다. 동맹의 목표는 그리스 도시들을 페르시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수많은 승리에 힘입어 동맹 도시의 수는 300개까지 늘어났고, 이 도시들은 군대와 자금을 헌납했습니다. 동맹 자금은 에게 해에 있는 신성한 작은 섬, 델로스에 있던 아폴론 성소에 보관되었습니다.

페르시아를 물리친 후 동맹 도시들은 그 뒤로도 계속 군대와 자금을 요구하는 아테네에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는 무자비하게 모든 반란을 제압하고 동맹의 보물 창고를 아크로폴리스로 옮긴 뒤, 동맹을 서서히 제국으로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스파르타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동맹 도시’에게 자유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했던 덕택이었고, 그 덕에 많은 지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각주   [ + ]

1. 도시의 수호자
2. 공예의 수호자
3. ‘선봉에서 싸우는 자’라는 뜻으로 전쟁의 여신으로 숭배 되었음을 암시
4. 신성한 제물
5. 의복
6. 소간벽
7. 라우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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